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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 도산선생 서거 82주기 추모식사(도산기념사업회 김재실회장)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03-09 13:34     조회 :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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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선생 서거 82주기 추모식사                       
                                                                                               
2020년 3월 10일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오늘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서거 8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매년 도산기념사업회에서는 국가보훈처, 강남구청, 흥사단과 같이 추모식을 거행하여 왔으나 금년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병의 확산으로 인하여 부득이 추모식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도산선생은 한국 근대사에 우뚝 솟은 한 민족의 스승이자 사상가요, 조직가며 독립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시기에 우리들은 선생님을 사모하고 그리워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혼탁과 거짓과 허위와 분열로 난세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선생님의 지혜와 가르침이 절실이 요구되기에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약사를 다시 한번 되새김으로 새로운 좌표를 찾고자 하는 마음에서 선생님의 약사를 올려드려 추모하오니 하늘나라에 계신 선생님께서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도산 안창호 선생 약사)

도산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도롱섬 농가에서 安興國과 제안 황씨의 3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셨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청일전쟁 등으로 혼란과 격동을 겪을 때 상경하여 구세학당(언더우드학당)에 입학, 3년 동안 신학문과 기독교를 공부하였고, 졸업 후에 조교로 임용되어 기독교에 입교하였습니다.

20세가 되던 1897년에 독립협회에 가입, 만민공동회 관서지부에 참여하고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를 순회하며 계몽연설을 하였는데 그 때 특히 평양 쾌재정에서 하신 연설은 경향 각지에서 높이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22세가 되던 1899년 강서군 동진면에 점진학교를 세워 근대 육영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도산선생은 25세가 되던 1902년 이혜련과 결혼하고 그해 10월 도미,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주경야독을 하였고 1903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韓人親睦會를 조직, 지도하였으며 그 이듬해 4월에는 이를 발전시켜 共立協會를 창립, 초대회장을 맡아 미주 한인사회에 민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도산 선생은 국운이 기울던 1907년 2월 귀국, 양기탁, 전덕기, 이갑 등과 함께 비밀결사 新民會를 조직하는 등 國亡을 당하는 1910년까지 여러 모양의 救國運動을 펼치셨습니다. 평양에 마산동자기회사와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서울․평양․대구 등지에 태극서관을 설립하는 등 토착자본 형성과 민족교육 사업에 진력하였습니다. 이밖에도 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장래 민족운동을 위한 인재양성의 경륜을 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직후 일제 헌병대에 피체되어 2개월 동안 구금되어 심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33세가 되던 1910년 4월 去國歌를 남기고 망명길에 오른 도산 선생은 유동열, 신채호, 이종호 선생 등 신민회 동지들과 중국 靑島에 모여 독립운동방략을 논의하고 그 해 9월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그곳에 먼저가 활동하던 이강, 정재관, 이갑 등과 조국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쓰고 그 이듬해 3월 구주를 돌아 미국으로 다시 가셨습니다. 도산 선생은 1912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의 북미, 하와이, 만주, 시베리아 지방총회를 망라한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해외동포 사회의 민족운동의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共立新報에 이어 新韓民報를 발행, 항일 민족언론을 창달하였습니다.

한편 1913년 5월 13일에는 8도 대표를 뽑아 향후 조국 광복에 이바지 할 흥사단을 조직하고, 민족대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단우에게 단체적 수련을 통하여 務實力行과 忠義勇敢의 정신으로 덕성을 함양하고, 심신을 단련하여 기력을 튼튼하게 하며, 전문적 지식 또는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건전한 인격을 길러 새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품위와 역량을 함양토록 지도하였습니다.

42세가 되던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그해 4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자 도산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독립자금 2만 5천달러를 소지하고  급거 상해로 가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 창립 초의 간난하던 임시정부를 주도하였고, 그해 9월 11일에는 몇 개로 흩어져 있는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통합임시정부를 출범시켜 향후 27년에 걸친 임시정부 활동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1925년 남경에 東明學院을 설립하였고, 그 전후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理想村(모범촌) 건설사업에 진력하였으며 또한 49세 때인 1926년부터는 중국대륙 각지와 동북지방을 순회, 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무렵 길림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에 의하여 일시 구금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에 상해에서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과 韓國獨立黨을 결성하고 大公主義를 제창하였습니다.
도산 선생은 55세되던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직후 상해에서 일경에게 포박되어 서울로 압송, 4년 실형이 선고되어 서대문과 대전 감옥에 수감되어 1935년 2월,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가출옥되어 흥사단의 국내조직인 同友會를 지도하였습니다.

60세가 되던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을 빌미로 다시 재수감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 끝에 그해 연말 병보석으로 출감되어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 1938년 3월 10일 61세를 일기로 순국하셨습니다.

도산 선생의 일생은 최후까지 이렇듯 간난하였으나,도산의 정신은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역사의 지표가 되었고 그의 행적은 민족수난을 극복하는 실천강령이 되고 있으며 도산 선생의 애국애족의 행적과 숭고한 유훈은 길이 민족사에 전승될 것입니다.


도산선생님 !
영면하시옵소서!  명복을 비옵나이다.


                                                                2020년 3월 10일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회장 김재실 재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