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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경하는 국가보훈처장님께
  글쓴이 : 정병기     날짜 : 11-08-14 05:49     조회 : 4547    
존경하는 국가보훈처장님께

삼복더위도 불구하고 국가보훈행정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저는 오늘 몇번을 생각하고 망설이다 증조부님을 떠올리며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글을 드립니다. 이제 밖에는 비가 내리고 66주년 광복절이 며칠 남지않았습니다. 도립운동하시다 체포 악명높던 마포 공덕리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하셨는데도 이렇게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체 36년의 노력을 하고 있는 증손자의 마음이 금년도 괴롭고 아픔니다.

저는 국가유공자이자 미발굴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일제강점기 경북에서 항일독립운동인 군자금운동을 하시다 체포되어 악명높던 마포 공덕리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하신 증조부(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찾아 36년간 노력하고 있답니다.

정말 피나는 노력을 기울리고 있지만 옥사기록이 제정호적이 기록되어 잇고 관련 자료들이 정부의 지시인 관보로 소각한 사실도 발견하고 있으나 후손들에게 거증자료를 요구하고 있는 현실에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진정한 독립유공자 발굴이 되기 위해서는 경성형무소 옥사기록이 발굴되어야 하며 제정호적 기록을 관심있게 살펴야 합니다. 다시한번 억울하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시다 일제에게 죽임을 당하고도 시신조차 돌려주지 않아 너무나 분하고 억울한 심정입니다.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중 체포 악명높던 마포 공덕리 105번지 경성형무소에서 1928.5.20. 오후3시15분 옥사하신 기록이 제정호적에 기록되었어도 관련 거증자료 부족으로 수십년간 지연되는 현실에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경성형무소 (마포형무소)는 1912년 9월 3일 마포구 공덕동 지금의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과 서울지방검찰창 서부지청 자리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신설됐다. 이 때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기존의 경성감옥(1907년 설치)은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당시 경성감옥(마포형무소)은 기결수만을 수용하던 곳이었으며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수감되기도 했다.

1923년 5월5일 ‘감옥’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형무소’란 이름이 붙게 되고, 남녀 분리 수감으로 서대문형무소에는 여자 수형자가, 이곳 경성형무소에는 무기수와 10년 이상의 남자 수형자가 수감되어 광복 때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항일독립투쟁 기간 경성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치르며 순국하기도 했다.

방송일: 20110228 kbs1 tv 시청자칼럼 정병기씨의 증조부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등본에 따르면 증조부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은 서울 마포구에 있던 경성형무소. 식민통치의 상징이었던 경성형무소는 1963년 안양교도소로 이전하면서 철거됐다. 형무소 자리에는 법원과 검찰청이 들어섰고, 청사 한 켠 작은 포석만이 과거 독립운동의 유적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정씨는 비록 경성형무소는 사라졌어도 역사만은 잊히지 않도록 마포구청에 역사관 건립을 요청해봤지만 자료가 없어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올해는 한일강제병합 101주년, 삼일운동 92주년을 맞는 해. 정씨는 치욕스러운 식민지배의 역사라 해도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독립운동의 교훈을 후손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는 역사의 현장을 복원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방송일: 20080814 kbs1 tv 우리들세상/시청자칼럼/다시보기 가능합니다.(출연자/정병기)서울에 사는 정병기씨는 정씨의 증조부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시다 옥사하셨지만 근거자료가 부족해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근거를 찾기 위해 36년째 노력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정씨는 증조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증빙자료 발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호소한다. 증조부 독립운동 증명하려고 자료발굴에 증손자 36년 노력하고 있습니다. 후손들에게만 미루지 말고 이제 정부가 앞장서야 합니다.[kbs1 tv ] 동영상 /증조부(정용선 선생)1928년5월20일오후3시15분 경성형무소 옥사 제정호적에 기록되어 모든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한바 있사오니 다시한번 관심을 가지고 검토하여 주시기를 거듭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증조부(정용선)의 호적 주소는
성명:정용선 (일명 정 재열 정차용이라고도 불리어졌다고 합니다.)
출생년월일:서기1883년12월17일생(명치16년12월17일생)
본?Я?: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391번지
거주지:대정3년 충청북도 청주군 양성면 도원리3통1호
대정4년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7통10호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062번지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독립자금 군자금)을 담당 하였다고 함

사망기록: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오후3시20분사망)형무소에소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꼭 저의 증조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게 관심을 가져 주시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증손자의 노력에 다시한번 관심을 기울려 주시고 자손된 도리를 다하고 국립묘지에 증조부의 가묘라도 모실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감사합니다. 정용선의 증손자 정병기(2010년 심사번호 7260 입니다.)


증조부 항일독립운동 체포 악명높던 경성형무소 옥사

36년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인정받지 못해 가슴아파
옥사기록담긴 제정호적 어렵게 발굴 국가보훈처에 제출해도 거증자료 부족이라고...

광복 66주년인데 … 독립운동가 후손 정병기씨 36년째 고투

광복절이 돌아오면 기쁨보다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일제강점기 독립과 광복위해 똑같아 목숨을 받치고도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고 이런 현실에 66주면 광복절을 맞는다.많은 것을 생각해 한다.진정한 독립유공자는 아직도 암흑속에 묻혀 잊혀지고 잃어버린 애국으로 버림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악명높던 경성형무소 옥사기록 제시해도 거증자료 더 찾아 오라고 하는 국가보훈처
정부는 행사 때 마다 나라위한 희생은 정부가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데....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마포구 공덕동 소재 서부지방법원. 검찰청)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36년째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정병기(54)씨.

그는 ‘광복 66주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단서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부양할 가족도 있고 몸도 성치 않지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증조부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다.

정 씨는 “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옥사기록 담긴 제정호적 제출하면 되었지 그무엇을 더 내놓으란 말인가.? 정부는 발굴노력으로 그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지 반문하고 싶은 심정이다.

정씨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

정씨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정부가 정권이 바꿀때마다 소각하거나 관보 지시로 없애버리고 후손들에게는 자료를 요구하는 현실이 앞.뒤가 맞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했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국가보훈처는 물론 국가권익위원회 청와대에까지 서류를 안 내밀어 본 곳이 없지만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안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해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씨는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년 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정씨 할아버지는 일제의 눈을 피해 풍정리 금정광업소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숨졌다. 정씨 자신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지난 1980년 강도살인범을 붙잡다 부상을 당했다. 당시 후유증에 간경화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정씨는 “독립운동가를 찾는 일을 후손들에게만 떠넘기는 정부가 야속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며 눈시울을 붉히며 정부만 바라보고 8월을 지내고 있다.반드시 증조부의 나라찾기 위한 항일독립운동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 받을 날이 반드시 찾아오리라고 믿는다. 글쓴이/정용선의 증손자<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