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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광복절 맞아 애국선열 숭고한 희생정신 가슴에 되새겨야
  글쓴이 : 정병기     날짜 : 12-07-07 21:50     조회 : 4111    
<기고> 광복절 맞아 애국선열 숭고한 희생정신 가슴에 되새겨야

진정한 민족의 독립과 광복은 아직도 더 노력해야

나라위해 목숨 받치고도 버림받고 잊혀진 애국으로 역사 속에 묻혀 안타까워
미발굴독립운동가 후손들 뿔뿔이 흩어져, 머슴살이 처가살이 전전, 고생 달고 살아,

광복 제67주년, 버림받고 잃어버린 애국이 되지 않게 정부가 자료 발굴 앞장서야 할 것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 가슴앓이를 해야 하는 슬픈 사연들이 많다. 미발굴독립유공자 발굴과 해결문제가 바로 정부의 더 미룰 수 없는 현안이자 당면 과제라고 본다. 후손들이 선조 독립운동 자료 찾아 36년 고군분투 하고 있으나 정부의 무관심과 자료의 부실 관리부족과 역사인식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안타깝다. 광복 67주년,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갔지만 당시 나라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다 옥사하신 무명의 애국투사와 독립투사들의 애국은 빛이 바래거나 잃어버린 애국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가고 있어 유감스럽고 통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분이다, 독립운동가 후손 정용선선생의 증손자 36년째 고군분투하고 있다.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원래자리 공덕동 서부법원자리)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36년째 외롭고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미발굴독립유공자의 후손인 증손자가 있다. 나는 ‘광복 67주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만사를 제쳐놓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단서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부양할 가족도 있고 몸도 성치 않지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증조부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다.

나는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비록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증조부님이 자랑스러운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마음 뿌듯하게 생각한다." “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주장해 왔고 그것 이사실이다. 옥사시록이 제정호적에 확연하게 나와 있다. 돌아가신 고모나 큰댁이 증조부님 때문에 온샂수난과 고초를 겪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형무소장이 보낸 옥사했다는 사실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 그 증거는 지금도 제정호적에 자세히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도 못 믿는다면 그 무엇을 믿겠는가?

일제강점기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라고 본다. 그 사실은 바로 일제가 형무소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 그리고 굶주림과 강제노역으로 옥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했다. 개가한 인동 장씨집안 호적(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2리)을 보면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는데도 정부는 두 손 놓고 있어 안타깝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당시 수형당한 경성형무소가 불에 탔기 때문이다. 이는 후손들의 귀책사유가 아니라 정부문서를 관리하는 정부의 책임이라고 본다. 국가보훈처는 물론 국가권익위원회 청와대에까지 서류를 안 내밀어 본 곳이 없지만 ‘객관적인 입증자료인 거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증손자인 본인이 국내에서 안 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해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정권인 전두환 군사정권이 관보로 지시(형의실효에 관한 법률)“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년 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관련 자료는 반영구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서류임에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지난정부의 실책이라고 본다. 그래도 개인이 후손들이 책임지고 찾아와야 한단 말인가?

조부이신 정덕수 할아버지는 인접 금광(풍정광업소)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숨졌다. 증손자인 자신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지난 1980년 강도 살인범을 붙잡다 부상을 당했다. 당시 후유증에 간경화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겪은 고통과 수모를 어찌 말이나 글로 다할 수 있겠는가? 본인은“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자료를 찾는 일을 후손들에게만 떠넘기는 정부가 야속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정부도 이제 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그 후손들 가슴에 못 박는 일이 없게 최선을 다해 한을 풀어 주어야 할 것이며, 일제강점기 관련 당시 제정호적도 중요하게 다루고 살펴 독립유공이 인정되는 분들에 대해서는 명예를 찾아주고 그 후손들에 대한 배려와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국가가 부강해지고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나라와 민족의 부름 앞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애국선열과 독립투사 미발굴독립유공자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나라위해 피 흘린 목숨 받친 결과가 결코 변할 수 없으며 역사적 가치가 혼동되거나 평가절하 돼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고귀한 희생과 헌신에 보답하고 숭고한 정신을 받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모진고문과 강제노역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친 악명 높던 마포 경성형무소 식민지역사관을 세워 민족의 치욕스러운 식민지 역사라도 제대로 보존하고 가르쳐 후손들에게 일제의 만행과 탄압사실을 알려야 할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게 될 것이다. 지난 과거의 잘못된 사실을 알려야 살아있는 올바른 역사교육이고 민족교육이 아닌가 생각한다.

덮고 가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제대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나라위해 목숨 받친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은 정부가 끝까지 책임을 지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하며 예우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본다. 다시한번 정부는 말이나 구호보다 독립을 위해 목숨 받치신 옥사자에 대한 철저한 자료검증과 발굴을 통하여 그 명예를 찾아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 주기를 아울러 바란다. 글쓴이/정병기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