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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포에게 고하는 글
2. 합동과 분리
3. 무정(無情)한 사회와 유정(有情)한 사회
4. 합동의 조건-지도자
5. 대한 청년의 용단력과 인내력
6. 사업에 대한 책임심

 
 
도산선생의 『동아일보』 1925년 1월 23일자·24일자·25일자·26일자에 4차에 걸쳐 국내의 동포에게 드리는 글로서 연재되었는데, 26일자 논설은 전문 삭제되었다.
이 글은 1924년 4월 8일 도산이 북경에 온 이광수를 맞이하여 그를 통해 구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총독부가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온건한 표현을 썼음에도 26일자 논설 삭제 이후에는 연재가 중단되었다. 이후 『동광』잡지에 다시 연재되었고 나머지 원고도 게재되었지다.
그러나 당시 출판법에 의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의 원고검열을 받아야 했기에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용어 선택에서 '대한'을 '조선'으로 해야 했으며, 상당히 완화된 표현으로 고쳐 게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 비관적인가 낙관적인가
 
- '국내동포에게 드림' - 『동아일보』 1925.1.23일자 · 24일자 게재
우리 민족의 앞날에 대해 낙관하며 옳은 목적을 세워 전진할 것을 민족에게 당부한 글이다.
 
 

묻노니 여러분은 우리 전도 희망에 대하여 비관을 품으셨습니까, 낙관을 품을셨습니까. 여러분이 만일 비관을 품으셨으면 무엇 때문이며 또한 낙관을 품었으면 무엇 때문입니까. 시세와 경우를 표준함입니까. 나는 생각하기를 성공과 실패가 먼저 목적 여하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줄로 확실히 믿으면 조금도 비관은 없을 것이요 낙관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의지하여 살피면 그른 목적을 세운 자가 일시일시 잠시적 성공은 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야 말고, 이와 반대로 옳은 목적을 세운 자가 일시일시로 잠시적 실패는 있으나 결국은 성공하고야 맙니다.
그러나 옳은 목적을 세운 사람이 실패하였다면 그 실패한 큰 원인은 자기가 세운 목적을 향하고 나가다가 어떠한 장애와 곤란이 생길 때에 그 목적에 대한 낙관이 없고 비관을 가진 것에 있는 것이외다. 목적에 대한 비관이라 함은 곧 그 세운 목적이 무너졌다 함이외다. 자기가 세운 목적에 대하여 일시일시로 어떠한 실패와 장애가 오더라도 조금도 그 목적의 성공을 의심치 않고 낙관적으로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자는 확실히 성공합니다. 이것을 인류의 역사를 바로 보는 자는 누구든지 다 알만한 것이외다. (이상 『동아일보』 1925. 1.23일자)
그런데 이에 대하여 여러분께 고할 말씀은 옳은 일을 성공하려면 간단없는 옳은 일을 하여야 하고 옳은 일을 하려면 옳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깊이 생각하자 함이외다. 돌아보건대 우리가 왜 이 지경에 처하였는가. 우리가 마땅히 행할 옳은 일을 행치 아니한 결과로 원치 않는 이 지경에 처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는 옳은 목적을 세웠거니 하고 그 목적을 이룸에 합당한 옳은 일을 지성으로 지어나가지 않으면 그 목적을 세웠다 하는 것이 실지가 아니요 허위로 세운 것이기 때문에 실패할 것입니다.
옳은 일을 지성으로 지어나가는 사람은 곧 옳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스스로 경계하고 여러분 형제 자매에게 간절히 원하는 바는 옛날과 같이 옳은 일을 지을 만한 옳은 사람의 자격을 가지기에 먼저 노력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희망점을 향하고 나아가도 당시의 시세와 경우가 매우 곤란하다고 할 만 합니다마는 밝히 살펴보면 우리 앞에 있는 시세와 경우는 그리 곤란한 것도 아니외다. 그러나 나는 이 시세와 경우를 큰 문제로 삼지 않고 다만 우리 무리가 일제 분발하여 의로운 자의 자격으로 의로운 목적을 굳게 세우고 의로운 일을 꾸준히 지어나가면 성공이 있을 줄 확실히 믿기 때문에, 비관은 없고 낙관뿐입니다.
우리 동포 중에 열 사람, 스무 사람이라도 진정한 의로운 자의 정신으로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면 장래 천 사람, 만 사람이 같은 정신으로 같이 나아가질 것을 믿습니다.

 
 
(2)우리 민족사회에 대하여 불평시하는가 측은시하는가
 
- 『동아일보』 1925.1.24 · 25일자에 게재
현재 우리가 처한 사회현상을 불평하지 말고 측은시하여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불행에 빠진 민족을 구하여야 한다는 당부 글이다.
 
 

묻노니 여러분은 우리 사회 현상에 대하여 불평시합니까 측은시합니까. 이것이 한번 물어 볼 만하고 생각할 만한 문제입니다.
내가 살피기까지는 우리 사람들은 각각 우리 시회에 대하여 불평시하는 태도가 날로 높아 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조선 사회 현상은 불평해 볼 만한 것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사람 중에 중학 이상 정도 되는 급에 있는 이들은 불평시하는 말이 더욱 많습니다. 지식 정도가 높아가므로 관찰력이 밝아져서 오늘 우리사회의 더러운 것과 악한 것과 부족한 것의 여러 가지를 전보다 더 밝히 보므로 불평시하는 마음이 많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불평시하는 그 결과가 자기 민중을 무시하고 배척하게 됩니다. 그 민중이 각각 그 민중을 배척하면 멸족(滅族)의 화를 벗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우 위험하다고 함이외다.
그런즉 우리는 사회에 대하여 불평시하는 생각이 동하는 순간에 측은시하는 방향으로 돌려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못나고 어떻게 악하고 어떻게 실패한 자를 보더라도 그것을 측은시하게 되면 건질 마음이 생기고 도와 줄 마음이 생기어 민중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노력할 열정이 더욱 생깁니다. 어느 민족이던지 그 민중이 각각 그 민중을 붙들어 주고 도와주고 건져 줄 생각이 진정으로 발하면 그 민중은 건져지고야 맙니다.
여러분이시어! 우리가 우리 민족은 불평시할 만한 민족인데 우리가 억지로 측은시하고 함인가, 아닙니다.
자기의 민족이 아무리 못나고 약하고 불미하게 보이더라도 사람의 천연한 정으로 측은시하여질 것은 물론이어니와, 그 밖에 우리는 우리 민족의 경우를 위하여 또한 측은시할 만 하외다. 지금의 우리 민족이 도덕적으로 지식으로 여러 가지 처사하는 것이 부족하다하여 무시하는 이가 있으나 우리의 민족은 근본적으로 무시할 민족이 아닙니다.(이상 『동아일보』 1925. 1. 24일자)
우리 민족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기질로 아름다운 산천에 생장하여 아름다운 역사의 교화로 살아온 민족이므로 근본이 우수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와 같이 일시 불행한 경우에 처하여진 것은 다만 구미의 문화를 남보다 늦게 수입한 까닭입니다. 일본으로 말하면 구미와 교통하는 '아시아' 첫 어귀에 처하였으므로 구미와 먼저 교통이 되어 우리보다 신문화를 일찍 받게 되었고, 중국으로 말하면 '아시아' 가운데 큰 폭원(幅圓)을 점령하였으므로 구미 각국이 중국과 교통하기를 먼저 주력한 까닭에 또한 신문화를 먼저 받게 되었으나, 오직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 처하지 아니하였고 동아의 신문화가 처음으로 오는 당시의 정권을 잡았던 자들이 몽매 중에 있었으므로 신문화가 들어옴이 늦어졌습니다. 만일 우리 민족이 일본이나 중국의 구미 문화가 들어올 그 때에 같이 그 신문화를 받았더라면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이나 중국 민족보다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일본 민족은 해도적(海島的) 성질이 있고 중국 민족은 대륙적 기질이 있는데 우리 민족은 가장 발전하기에 합당한 반도적 성질을 가진 민족입니다.
근본 우수한 지위에 처한 우리 민족으로서 이와 같이 불행한 경우에 처하여 남들이 열등의 민족으로 오해함을 당함에 대하여 스스로 분하고 서로 측은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즉 우리의 천연의 정을(중간미상) 마음과 또는 우리의 경우를 생각하고 불평시하는 마음을 측은시하는 방향으로 돌이켜 상호 부조의 정신이 진발(進發)하면 우리 민족의 건져짐이 이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이 우리 청년 남녀에게 대하여 우리 민중을 향하여 노한 눈을 뜨고 저주하는 혀를 놀리지 않고 5년 전에 흐르던 뜨거운 눈물이 계속하여 흐르게 하기를 바랍니다.

 
 
 
(3) 주인인가 여인(旅人)인가
 
-『동아일보』 1925.1 25일자 게재, 『동광』 1926.6월호에 재게재
우리 민족사회에 대한 영원한 책임감을 갖는 진정한 주인이 되어 민족을 구원할 구체적 방법과 계획아래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할 것을 당부한 글이다.
 
 

묻노니 여러분이시어,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대한 사람은 물론 다 대한 사회의 주인인데 주인이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묻는 것이 한 이상스러운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대한인이 된 자는 누구든지 명의상 주인은 다 될 것이되 실상 주인다운 주인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집이든지 주인이 없으면 그 집이 무너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 집을 점령하고, 어느 민족 사회든지 그 사회에 주인이 없으면 그 사회는 망하고 그 민족이 누릴 권리를 딴 사람이 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생각할 때에 먼저 우리 민족 사회에 주인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하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고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로부터 여러분은 각각 우리의 목적이 이 민족 사회에 참주인인가 아닌가를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이 아니면 여객(旅客)인데 주인과 여객을 무엇으로 구별할까. 그 민족 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심이 있는 자는 주인이요 책임심이 없는 자는 여객입니다. 우리가 한 때에 우리 민족 사회를 위하여 뜨거운 눈물을 뿌리는 때도 있고 분한 말을 토하는 때도 있고 슬픈 눈물과 분한 말뿐 아니라 우리 민족을 위하여 몸을 위태한 곳에 던진 때도 있다 할지라도 이렇다고 주인인 줄로 자처하면 오해입니다. 지나가는 여객도 남의 집에 참변이 있는 것을 볼 때에 눈물을 흘리거나 분언을 토하거나 그 집의 위급한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투신하는 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이 아니요 객인 때문에 한 때 그리고 말뿐 그 집에 대한 영원한 책임심은 없습니다. 내가 알고자 하고 또 요구하는 주인은 우리 민족사회에 대하여 영원한 책임심을 진정으로 가진 주인입니다.
.......(중략)....
그 집안 일이 잘되어 나가거나 못되어 나가거나 그 집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그 집 식구가 못났거나 잘났거나 그 식구를 버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지시과 자본의 능력이 짧거나 길거나 자기의 있는 능력대로 그 집의 형편을 의지하여 그 집이 유지하고 발전할만한 계획과 방침을 세우고 자기 몸이 죽는 시각까지 그 집을 맡아가지고 노력하는 자가 참주인입니다. 주인된 자는 자기 집안 일이 어려울 경우에 빠질수록 그 집에 대한 염려가 더욱 깊어져서 그 어려운 경우에서 건져내 방침을 세우고야 맙니다. 이와같이 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을 몇 번 실패하든지, 그 민족사회의 일을 분초에라도 버리지 아니하고, 또는 자기 자신의 능력이 족하든지 부족하든지 다만 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이상은 『동아일보』 1925.1.25일자)
내가 옛날 고국에 있을 때에 한 때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사회를 위하여 일한다는 자선사업적 일꾼은 많이 보았으나, 영원한 책임을 지고 주인 노릇하는 일꾼은 드물게 보았으며 또 일종의 처세술로 체면을 차리는 행세거리 일꾼은 있었으나 자기의 민족사회의 일이 자기의 일인 줄 알고 실제로 일하는 일꾼은 귀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는 지금와서는 그 때 보다 주인 노릇하는 일꾼이 생긴 줄 압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수효가 많지 못한 듯 합니다. 한 집 일이나 한 사회 일의 성쇠흥망이 좋은 방침과 계획을 세우고 못세우는 데 있고 실제 사업을 잘 진행하고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주인이 있는 뒤에야 문제지 만일 한 집이나 한 사회에 책임을 가진 주인이 없다고 하면 방침이나 사업이나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즉 어떤 민족사회의 근본 문제가 주인이 있고 없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살피어 내가 과연 주인이요 나밖에도 다른 주인이 또한 많다고 하면 다행이거니와 만일 주인이 없거나 있더라도 수효가 적을 줄로 보시면 다른 일을 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주인의 자격을 찾고 또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의 자격을 갖게 하는 그 일부터 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어찌하였든지 이 시간 이 경우에 임하여서는 주인 노릇할 정도 일어날 만하고 자각도 생길만 하다고 믿습니다.

 
 
 
 
『동광』 1926.6월호에 게재
'합동만이 살 길이며 분리하면 죽는다'라는 진리 앞에 합동의 공통적 조건과 목표를 세우고 공통적 신용을 세워 신의의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당부한 글이다.
 
 

오늘 우리 대한을 보면 합해야 되겠다 하면서 어찌하여 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짓는가. 왜 싸움만 하는가 하고 서로 원망하고 서로 꾸짖는 소리가 대한 천지에 가득 찼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대한 사람은 합동적이 아니오 분리적인 것을 알 것이오. 또 오늘날 대한사람은 합동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 합니다. 합동하면 흥하고 분리하면 망하며 합동하면 살고 분리하면 죽는다 이 모양으로 합동이 필요하다는 이론도 사석이나 공석이나 신문이나 잡지에 많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대한사람은 합동해야 된다는 이론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 대한 민족의 개개인은 과연 합동의 필요를 진실하게 깨달았는가. 이것이 의문입니다. 남더러 합하지 않는다 편당만 짓고 싸움만 한다고 원망하고 꾸짖는 그 사람들만 다 모이어서 합동하더라도 적어도 몇백만 명은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하거늘 아직도 그러한 단체가 실현된 것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아마 아직도 합동을 원하기는 하지만은 합동하고 못하는 책임을 남에게만 미루고 각각 자신이 합동의 길을 위하여 노력하는 정도까지에는 이르지 못한 듯 합니다......(중략)....
내가 이제 합동에 대하여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과거에 거의 역사적으로 습관적으로 합동이 못되고 온 원인과 또 현시에 합동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며 합동을 하려면 취하여야 할 방법을 들어서 말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길어질 근심이 있으므로 현시 상태에 가장 필요하다고 믿는 몇가지만 말하려 합니다.
첫째는 전민족이 공통적으로 같이 희망하고 이해할만한 조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요구하는 합동은 민족적 감정으로 하는 합동이 아니요, 민족적 사업에 대한 합동이외다. 민족적 감정으로 하는 합동은 인류사회에 폐단을 주는 것이라 하여 깨뜨리어 없이 하려고 하는 이조차 있습니다.
나는 네가 민족적 감정으로 된 합동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민족적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합동을 요구한다 함은 민족적 감정을 기초로 이루어진 민족주의가 옳다, 옳지않다 하는 것을 근거로 하는 말이 아니외다. 어느 민족이든지 '우리 민족' '우리 민족'하고 부를 때에 벌써 민족적 감정을 기초로 한 합동은 천연적 습관적으로 있는 것이니, 합동하자 말자하고 더 말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요구하고 힘쓸 것을 민족의 공통한 생활과 사업을 위하여 하는 합동이외다.
그런데 일을 위한 합동은 그 일이 무슨 일이며 그 일을 할 방법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한 후에 생길 것이니 덮어놓고 무조건으로 '합동하자' '합동하자'하는 것은 아무리 떠들고 부르짖어도 합동의 효과는 얻을 수도 맡을 수도 없을뿐더러 일에 대한 조건이 없이는 합동을 요구할 이유도 발생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민족이 합동함에는 그 민족이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조건이 선 후에야 된다 함은 세계 각국의 역사와 현재의 실례를 들어서 말할 것이 많습니다마는 우리 민족이 최근에 지낸 경험을 가지고라도 좋은 실례를 삼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이 합동할 조건이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는 목적이요, 둘째 목적은 이미 세워진 것이니까 이에 대해서는 다시 세우자 말자 할 필요도 없고 오직 남은 것은 그 방침과 계획뿐이니,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합동의 공통적 조건이 되고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이 원칙에 의지하여 자기네 민족과 사회의 현재와 장래를 위하여 참으로 정성껏 연구하여 그 결과를 가장 정직하게 가장 힘있게 발표할 것입니다. 이 모양으로 각각 의견을 발표하노라면 그것들이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지하여 마침내 가장 완전한, 가장 여러 사람의 찬성을 받는 '여론'을 이룰 것이니 이 여론이야말로 한 민족의 뜻이요, 소리요, 또 명령이외다.
우리는 자유의 인민이니 결코 노예적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를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자의 양심과 이성뿐이라야 할 것이니, 결코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에 맹종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각각 대한의 주인이기 때문에 내 대한을 어찌할까 하는 문제에 대하여 마치 상받고 일한는 고용꾼 모양으로 자기의 공로를 내세울 필요가 없고 다만 우리의 일인 대한의 일만 잘 되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각각 자기의 의견을 존중하는 동시의 남의 의견을 존중하여 비록 어떤 의견이 사사로운 감정으로는 자기와 좋지 못한 개인에게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이 자기의 민족 사회의 이롭다고만 생각하면 자기가 일찍 생각하였던 의견을 버리고 그 의견을 취하여 자기의 의견을 만들기를 즐겁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진정한 주인인 책임심을 가지고 실지로 방침과 계획을 세워 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제 의견 남의 의견을 가릴 것이 없이 제 일에 좋은 의견이면 취하는 것입니다.
....(중략) ....
둘째는 공통적 신용을 세울 것입니다. 이 위에 말하기를 민족적 합동은 공통한 조건을 세움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거니와 그 보다 먼저 될 문제는 사회의 각 분자되는 개인들의 신용입니다. 서로 신용이 없으면 방침이 서로 같더라도 합동될 수가 없고 서로 신용이 없으면 공통한 목적과 방법을 세우기부터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통한 방침을 세워 가지고 공통한 진행을 하려면 즉 합동의 사실을 이루려면 먼저 사회의 신용을 세워야 하겠고 사회의 신용을 세우려면 먼저 각 개인이 신용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한 때 잠시의 여행을 하는데도 의심스러운 사람과는 통행하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하물며 한 민족이 위대한 사업을 지어나가려 할 때에 자기 마음에 의심하는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할 뜻이 없을 것은 면하지 못할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민족 사회에 이처럼 합동이 되지 못하고 분리한 상태에 있는 것은 공통한 방침을 세우지 못함과 그 밖에 다른 이유도 많지마는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대한인이 대한인을 서로 믿을 수 없는 것이요, 서로 믿을 수 없이 된 것은 서로 속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아아 슬프고 아프다. 우리 민족이 이 때문에 합동을 이루지 못하였고 서로 합동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망에 임하였습니다. 사망에 임한 것을 알고 스스로 건지기를 꾀하나 아직도 서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민족적 합동운동이 실현되지 못합니다. 대한민족을 참으로 건질 뜻이 있으면 그 건지는 법이 멀리 구하지 말고 먼저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되는 속임을 버리고 각 개인의 가슴 가운데 진실과 정직을 모시어야 하겠습니다. 대한사람은 대한사람의 말을 믿고 대한사람은 대한사람의 글을 믿는 날에 대한사람은 대한사람의 얼굴을 반가워하고 대한사람은 대한사람으로 더불어 합동하기를 즐거워 할 것입니다.
대한의 정치가로 자처하는 여러분이시여. 이런 말을 하면 종교적 설교같다고 냉소하시지 마시고 만약 대한민족을 건질 뜻이 없으면 모르거니와 진실로 있다고 하면 네 가죽 속과 내 가죽 속에 있는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채우자고 거듭거듭 맹세합니다.

 
 
 
 
『동광』 1926.6월호에 게재
유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서로를 존중하며 정의의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당부한 글이다.
 
 

정의(情誼)는 친애와 동정의 결합이외다. 친애라 함은 어머니가 아들을 보고 귀여워서 정으로써 사랑함이요, 동정이라 함은 어머니가 아들이 당하는 고(苦)와 낙(樂)을 자기가 당하는 것같이 여김이외다. 그리고 돈수(敦修)라 함은 있는 정의(情誼)를 더 커지게, 더 많아지게, 더 두터워지게 한다 함이외다. 그러면 다시 말하면, 친애하고 동정하는 것을 공부하고 연습하여 이것이 잘 되도록 노력하자 함이외다. 인류 중 불행하고 불쌍한 자 중에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자는 무정한 사회에 사는 사람이요, 복 있는 자 중에 가장 다행하고 복있는 자는 유정한 사회에 사는 사람이외다. 사회에 정의가 있으면 화기(和氣)가 있고, 화기가 있으면 흥미가 있고, 흥미가 있으면 활동과 용기가 있습니다.
......(중략).....
우리 대한 사회는 무정한 사회외다. 다른 나라에도 무정한 사회가 많겠지마는, 우리 대한사회는 가장 불쌍한 사회외다. 그 사회의 무정이 나라를 망케 하였습니다. 여러 백년 동안을 대한사회에 사는 사람은 죽지 못하여 살아 왔습니다. 우리는 유정한 사회의 맛을 모르고 살아 왔으므로 사회의 무정함을 견디는 힘이 있거니와, 다른 유정한 사회에 살던 사람이 일조에 우리 사회 같은 무정한 사회에 들어오면 그는 죽고 말리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사활문제를 앞에 두고도 냉정한 우리 민족이외다. 우리가 하는 운동에도 동지간에 정의가 있었던들 효력이 더욱 많겠습니다. 정의가 있어야 단결도 되고 민족도 흥하는 법이외다.
.......(중략)......
우리는 이 정의돈수 문제를 결코 심상히 볼 것이 아니외다. 우리가 우리사회를 개조하자면, 먼저 다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조선(祖先)적부터 무정한 피를 받았기 때문인지 아무래도 더운 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기르는 공부를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뒤에야 참 삶의 맛을 알겠습니다. 일언 일동에 우리 사이의 정의를 손상하는 자는 우리의 원수외다. 과거나 현재의 우리 동포는 어디 모인다 하면 으레 싸우는 것으로 압니다. 남의 결점을 지적하더라도 결코 듣기 싫은 말로 하지 말고 사랑으로써 할 것이외다. 이제 정의 기르는 데 주의할 몇 가지를 말하겠습니다.

1. 남의 일에 개의치 말라. 우리가 걸핏하면 주제넘게 됩니다. 남의 허물이 있으면 이것을 적발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각각 자기 일만 살피고 자기의 허물만 스스로 고칠 뿐이요, 결코 남의 일이나 허물에 개의치 말 것이외다.
2. 개성을 존중하라. 모진 돌이나 둥근 돌이나 다 쓰이는 장처(長處)가 있는 법이니, 다른 사람의 성격이 나의 성격과 같지 않다 하여 나무랄 것이 아니외다. 각각 남의 개성을 존중하여 자기의 성격대로 가지는 것을 시인할 것이외다.
3. 자유를 침범치 말라. 아무리 같은 동지라 하더라도 각 개인의 자유가 있는 것인데 이제 남을 내 마음대로 이용하려다가 듣지 않는다고 동지가 아니라 함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외다. 서양 사람은 비록 자기 자녀에 대하여서도 무엇을 시킬 때에 하겠느냐(Will you?)고 물어보는 의미로 말하며 그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4. 물질의 의뢰를 말라. 우리네의 친구들 중에 돈 같은 것을 달라는데 주지 아니하면 그만 틀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에게 물질적 의뢰를 하지 아니함이 가하고 설혹 의뢰하였더라도 자기의 요구대로 되지 않는다고 정의를 상할 것은 아니외다.
5. 정의를 혼동하지 말라. 부자·부부·친구·동지의 정의가 다 각각 다른 것이외다. 부자간의 정의와 친구간의 정의가 같겠습니까. 또 같은 동지끼리라도 더 친한 사분(私分)이 있을 것이외다. 그러니 누구는 더 사랑한다고 나무라지 말 것이외다.
6. 신의를 확수하여라. 서로 약속한 것을 꼭꼭 지켜야 정의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만일 한다고 한 것을 그대로 안하면 서운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신의를 확수하는 것이 정의를 기르는데 한 가지 조건이 됩니다.
7. 예절을 존중하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좀 친하여지면 예절이 문란하여 집니다. 그래서 구친(舊親)간의 무례히 가는 것이 서로 친애하는 표가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무례한 것으로는 친구에게 호감을 못주고 도리어 염증이 생기게 합니다.
그 나라의 애국자를 대우하는 것도 무정한 사회와 유정한 사회가 다릅니다. 우리 무정한 사회에서는 애국자의 결점만 집어내다가 위난에 빠질 때에는 구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유정한 사회에서는 그렇게 아니합니다. 또 어떤 이가 공익사업에 돈을 내다가도 다시 더 안 내면 그전에 낸 것을 고맙게 생각지 않고 도리어 욕을 합니다. 이런 무정한 사회가 어디 있습니까.
유정한 국민은 아무리 점잖은 신사나 부인이라도 노사에서 환난을 만난 사람을 보면 그 체면과 수고를 돌아보지 않고 기어이 구원하여 줍니다. 여기는 귀천의 별(別)도 없습니다. 자기의 좋은 옷을 찢어서라도 상한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간호하여 줍니다.
정의 없는 대한 민족의 고통은 실로 지옥 이상이외다. 대한인의 사회는 가시밭이외다. 아무 낙이 없습니다. (중략)
정의를 힘쓰되 도를 지킬 것이오. 우리사회에는 공의(公義)와 정의가 없어지고 문란함과 무례한 것이 친애의 표가 되었소.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랑, 어머니가 울면 울고, 어머니가 웃으면 웃는 어린아이. 이것이 참사랑의 표이오. 서양인은 길에서 환난당한 사람을 만나면 기어이 살려 주려고 귀천을 분별않고 애쓰고 간호합니다. 남의 환난을 볼 때에 참으로 동정하는 이가 우리 단우이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오직 정의 돈수 네 글자에 의지하여 삽시다.

 
 
 
 
『동광』 1926.8월호에 게재
협잡과 싸움만 하는 사람이 아닌, 정직하게 민중을 위하여 일하는 이를 가리고 그 사람의 주의와 본령과 방침과 능력이 나와 다른 사람보다 앞선 것을 본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내세워야 한다고 당부한 글이다.
 
 

우리가 상당한 공통적 방침하에 서로 믿고 모이어 합동적으로 나아가려 하면 없지 못할 필요한 물건이 지도자외다. 세상 무슨 일이든지 단독적 행동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좋은 지도자의 지도를 요구하되 그다지 절실한 필요가 없다 하려니와, 합동적 생활에 있어서는 작은 협동이나 큰 협동이나 그 협동한 전체를 지도하는 지도자가 있고야 협동의 사실을 이루고 협동의 효과를 거둡니다. 이와 반대로 지도자가 없다고 하면 협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이루지 못하고 따라서 그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중략).....
소위 민족주의를 타파하고 세계주의를 표방한다는 그 민족에도 그 주의를 가지고 일하는 그 민족의 대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시여, 우리는 그와같이 지도자를 세웠었습니까 아니 세웠었습니까. 이 글을 보는 형제나 자매 중에 혹 말하기를 이것은 누가 모를까, 쓸데없는 유치설이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대한 사회의 현상을 보면 이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 크게 의문됩니다. 근대의 청년들은 평등·동등성을 주장하면서 평생에 자기에게는 지도자를 두는 것을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우리 사람들이 합하자, 합하자 말은 하지마는 합동의 사실을 이루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을 큰일로 알고 그것을 위하여 생각하고 힘을 쓰는 사람을 만나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를 세워야 할 것은 물론 필요하지마는 내세울 지도자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귀에 많이 들리는 말은 대한 사회에는 아직도 지도자 자격이 없으니까 지도자를 아무리 세우려 하더라도 사실 불가능이므로 이 앞에 지도자의 자격이 생기는 때에는 세우려니와, 당분간은 할 수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 아닙니다. 오늘에 만일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 아닙니다. 오늘에 만일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하면 이 앞에 백년 천년 후에라도 지도자의 자격이 없을 것이요, 이 앞에 지도자 자격이 있으리라고 하면 오늘에도 그 지도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에 만일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 지도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때문인가 합니다. 지도자의 자격을 무엇으로 판정하는고? 어떠한 협동이든지 그 협동 중에 앞선 사람은 곧 지도자의 자격을 가진 자외다. 바꾸어 말하면 지도자의 자격은 비교문제로 생기는데 그 비교는 다른 협동적 인물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요 어떤 협동 자체의 인물 중에 비교로 그 중 앞선 사람을 지도자의 자격으로 인정하게 됩니다.......(중략).......
위인이란 별 물건이 아니요 위인의 맘으로 위인의 일을 하는 자가 위인입니다. 남이야 알거나 모르거나 욕을 받고 압박을 받아 가면서 자기의 금전·지식·시간, 자기의 정열을 다 내어놓고 우리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그네들은 곧 위인의 맘으로 위인의 일을 하는 우리의 지도자가 될 만하기에 넉넉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분명히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일 때에는 여러분의 눈에도 응당 보이겠지요. 이와 같이 성의와 재능으로 앞선 사람들이 있는데 어찌하여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합니까.
내가 바로 살피었는지 모르거니와, 오늘 우리 사회를 대표한 지도자가 세워지지 아니한 것은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 이유가 되지 못함은 물론이거니와, 이밖에 다른 이유가 많다고 할지는 모르거니와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민족의 큰 원수라고 인정할 만한 시기 하나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은 지도자를 세우고 후원하기에 힘쓰는 것은 고사하고 지도자가 세워질까봐 두려워하여 지도자 될 만한 사람은 거꾸러뜨려 지도자 못 되기에 노력하는 듯합니다......(중략)......
지도자를 세워야 되겠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도 문제를 가지고 공중을 향하여 반론하기를 주저합니다. 그 이유는 그 말을 하여야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자기를 지도자라고 섬기어 달라는 뜻이라는 혐의나 박도 군중에게 배척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때문입니다. 아아 슬프다. 내 말이 너무한지 모르거니와 오늘 우리 사회 현상은 과연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 것이 극도로 달하였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지도자들이 바로만 하면 지도자를 세우지 않을 이유가 있으랴, 지도자놈들이 협잡이나 싸움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도자로 세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마는 이것은 말이 되지 못하는 말입니다. 지도자란 것은 앞선 사람이라 하는데 협잡만 하고 싸움만 하는 사람은 벌써 뒤떨어진 사람이거늘 지도자란 말부터 당치 아니한 말입니다. 그러면 협잡 아니하고 싸우지 아니하는 놈이 어디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있습니다. 많다고 할는지는 모르나 자기 금전, 자기 지식, 자기 능력을 가지고 정직하게 민중을 위하여 일하고 협잡을 도무지 아니하는 사람이 과연 있습니다. 또는 외형을 보면 남한테 욕도 받고 공격도 받고 모함도 받기 때문에 같은 싸움꾼인 듯 하나 그 욕과 그 핍박, 그 모함을 받으면서도 한 번도 저항의 행동을 취하지 않고 공평하고 원만한 맘으로 군중을 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피지마는 나의 살피는 것과 달리 다 협잡하고 다 싸움만 한다고 판정하더라도 그 중에 협잡과 싸움을 적게 하는 사람이 지도자의 자격입니다. 왜? 자체 인물에 비교하여 앞선 때문입니다. 남을 시기하는 태도를 없이하고 우리의 민족을 위하여 지도자를 찾아 세울 성의로 냉정한 머리를 가지고 살피면 과연 앞선 사람이 보입니다. 앞선 사람을 찾기 위하여 서늘한 머리로 사회를 살피는 정도에 이르는 것은 값없는 허영에서 떠나 자기 민족 사회의 사업을 실제로 표준하는 주인 되는 책임심이 있는 후에야 됩니다......(중략).....
무조건 허영만 표준하여 지도자라고 인정하지 말고 먼저 그 사람의 주의와 본령과 방침과 능력을 조사한 후에 그 주의와 본령이 내 개성에 적합하고 그 주의에 대한 방법과 능력이 나와 다른 사람보다 앞선 것을 본 후에 지도자로 인정할 것이요, 그것을 살피는 방법은 사회에 떠돌아다니는 요언 비어(妖言誹語)에 의하지 말고 그 사람의 실지적 역사와 행위를 밝게 살필 것입니다.
대주의 대본령이 맞고 큰 성의가 있는 줄로 인정한 후에는 그 사람이 한때 한때 말이나 일에 실수함이 있더라도 그것을 교정하여 주기를 노력할지언정 가볍게 배척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한때 허물로 사람의 평생을 버리고 한 가지 두 가지 허물로 그 사람의 전체를 버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과거시대에는 일불살육통(一不殺六通) 하였거니와 현실에는 육통생일불(六通生一不)합니다. 지도자를 택할 때에 친소 원근과 차당 피당의 관념을 떠나서 전 군중의 이해를 표준하고 공평 정직한 맘으로 할 것입니다.

 
 
 
 

『동광』 1926. 9월호에 게재
우리 사회가 부허와 거짓에 근거하지 말고 진실과 정의의 착실한 것에 근거하여 나아갈 것을 당부한 글이다.

 
 

부허는 패망의 근본이요, 착실은 성공의 기초외다. 그런데 우리 대한의 사회상태가 부허적인가 착실적인가. 다시 말하면 패망적인가 성공적인가. 이것을 크게 묻고 크게 말하고자 합니다.
.......(중략)....
대저 착실이란 것은 무슨 일이든지 실질적 인과율에 근거하여 명확한 타산하에 정당한 계획과 조직으로서 무엇을 어떠한 결과를 지어내겠다. 하고 그 목적을 달하기까지 뜻을 옮기지 않고 그 순서에 의지하여 각근한 노력을 다함을 이름이외다. 부허는 이와 반대로 인과의 원칙을 무시하고 정당한 계산과 노력을 아니하고 천에 한 번만에 한 번 뜨이는 요행수만 표준하고 예외적 행동으로 여기 덥썩 저기 덥썩 마구 덤비는 것이요. 또한 당초에 일의 성?불성 여하는 문제도 삼지 아니하고 다만 한때의 빈 명성이나 날리기 위하여 허위적 행사를 취하여 마구 들뜨는 것이외다. 이상에 말한 착실과 부허의 뜻만 밝게 이해하면 긴 이론이 없더라도 어느 것이 성공적이요. 어느 것이 패망적임을 쉽게 판단하겠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정치가의 사업은 오물꼬물하게 조직이니 타산이니 하는 학자적 사업이 아니요 엉큼하고 허황한 듯한 수단을 취한다 하며, 그 시대 일은 그 시대 군중의 심리를 이용한다 하여 일을 부허한 심리에 맞도록 꾸미고 헌장을 일삼으며 부허한 것을 장려하는 패도 있습니다마는 이 때가 수호지적 시대가 아니고 과연 학자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정치나 무엇이든지 일을 위하는 학자적 지식은 없더라도 학자적 관념은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복술 선생을 모시어다 놓고 미두점을 칠 때가 아니요 학자적 지식이 있는 이를 모시어다가 지도자로 세우고 그 지도를 밟아야 일할 때입니다. 가다가 한 때 부득한 경우로 인하여 군중의 그릇된 심리를 이용하고 허황된 수단을 잠시 취한다 하여도 불가하거든 하물며 부허한 것으로 기초와 본령을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해내 해외를 물론하고 과거의 부허한 원인으로 실패한 경험의 실증을 낱낱이 들어 밝혀 말하고자 하나 그것은 참고 그만두거니와, 대개 오늘 우리 사회의 위협 강탈과 사기 협잡과 골육 상잔하는 모든 악현상이 거의 다 이 부허로 기인하였고, 대한 사람이 대한 사람으로 더불어 서로 믿고 의탁하여 협동할 길이 막힌 것과 대한 사람이 대한 사람으로 더불어 질서를 차리어 이를 지어 나아갈 길이 막힌 것과 외인 한테까지 신용을 거두지 못하게 된 모든 원인이 또한 이 부허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부허로 인하여 무엇이든지 실제로 성공하기는 고사하고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외국 사람이 우리에게 충고를 줄 때에도 먼저 착실을 말하였습니다.
.......(중략)....
더욱이 우리가 하려고 하는 위대하고 신성한 사업의 성공을 허(虛)와 위(僞)로 기초하지 말고 진과 정으로 기초합시다. 다시 말씀하옵니다니 우리의 하려고 하는 위대하고 신성한 사업의 성공을 허와 위의 기초 위에 세우려고 하지 말고 진(眞)과 정(正)의 기초 위에 세우려고 합시다. 허와 위는 구름이요. 진과 정은 반석이외다.
......(중략)....
우리가 우리 민족사회의 현재와 장래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각각 주인된 자의 자격으로 우리 일정한 옳은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어떠한 곤란과 장애와 유혹이 있더라도 비관 낙망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거나 또는 다른 무엇에 듯을 옮기지 말고 철저한 정신으로 목적을 성공할 때까지 굳세게 나아가자 함이요. 공통한 조건을 세우고 나아가되 부허한 것으로 근거하지 말고 착실한 것으로 근거하여 나아가자 함이오니 여러 분은 나의 원하는 본 뜻에 유의하여 주소서. 혹 이것은 작은 문제요, 심상한 말로 생각할른지 모르거니와 나는 이 몇가지가 큰일을 하여가려는 우리 사회의 큰 걱정거리요, 큰 말로 여기는 까닭에 말씀함이외다. 우리 사회는 심상하다고 할만한 이상 몇가지에 대한 큰 각성이 생긴 후에야 내게서든지 뉘게서든지 이 이상의 큰 말이 나오고 큰 사실이 실현되리라고 생각하옵니다.

 
 
 
 

『동광』 1927. 1월호에 게재
대한의 청년들에게 낙망과 방황, 주저하지 말고 무슨 일이든지 용단력과 인내력을 갖고 신념에 따라 나아갈 것을 당부한 글이다.

 
 

오늘 대한의 청년들 앞에도 큰 원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압니까. 또 이것을 알면 이것을 처 이기려 합니까. 오늘 대한 청년들 앞에 공으로나 사로 막히어 있는 큰 원수는 곧 방황과 주저이외다. 할까 말까 하여 말까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방황이요, 주저외다. 여기는 공적도 있고 사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민족적으로 파멸의 지경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대하여 앞을 헤치고 나아가지 않고 방황하고 주저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공적이외다. 또 사람마다 자기 살아나갈 일을 자기가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개인이 살아나갈 일을 자기가 하지 않으면 자기 개인의 생존까지도 잘못되는 경우에 빠집니다. 그러니 여기 대하여 알아차리어서 나아가지 않고 방황하고 주저하여 있는 것이 사적이외다.
....(중략)...
일이 옳은가 그른가 이 일을 할까 말까 방황하고 주저하면 거기에는 고통이 생김니다. 또 결국은 낙망합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습니다. 나아가면 될 일이라도 안나아가서 안됩니다. 또 낙망한 끝에는 남을 원망하게 되고 심하면 남을 죽이게까지 됩니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래서 방황과 주저는 우리의 큰 원수라고 합니다. 또는 이 몸을 대한에 바치어서 일할까 자기를 위하여 일할까 호도 몽롱한 가운데 있는 이가 많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서도 어느 것이 옳은지 분명히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히 알 것은 공부도 농사도 장사도 아무것도 아니하고 놀고 먹고 떠돌아다니면서 방황하는 것은 아무 이익이 없고 다만 큰 해독만 끼치는 것이외다. 또 언제든지 다 배워가지고 다 벌어가지고 나아가서 일한다고 하면 크게 잘못이외다. 배우는 자나 벌이하는 자나 다 대한을 위하여 기회 올 때까지 한다고 결심하고 나아가면 그만 이외다.
남이야 알건 모르건 오늘 대한의 청년된 이는 대한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꼬를 스스로 연구하고 창구하여 옳다하는 바에 뜻을 세우고 그 세움 바를 다른 사람에게 선포하여 함께 나아갈 것이외다. 이것이 오늘 대한 민족이 다시 살아날 길이외다. 무엇이 옳다고 생각나거든 그것을 곧 붙잡아라. 그렇지 않으면 큰 기회를 놓치나니라. 이 말은 우리가 늘 가져둘 말이외다. 일에 대하여 도덕적과 이해적으로 헤아리어 선하고 이(利)하면 하되 공공연한 이가 되거든 그렇게 하기를 용감히 결단할 것이외다. 이 용단력이 없으면 대개는 방황 주저하게 됩니다. 또 목하에 안될 것만 보지말고 장래에 될 것을 헤아려 순서를 밟아 나아갈 것이외다. 한번 놓친 기회는 대개는 다시 얻지 못하게 되는 법이외다. 오늘 대한의 환경은 사회 도덕 방면으로든지 경제 방면으로든지 모두 심히 어렵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 이것을 헤치고 나아가려면 차마 견디는 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하므로 이러한 비관과 낙망할만한 처지에 있는 오늘 대한의 청년은 특별히 인내력을 길러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첫째 옳다하는 일에 밝은 판단을 내리고 둘째 판단한 일은 끝까지 잡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성공이 있습니다. 대한 청년의 방황과 주저하는 것이 아주 소멸되고 무엇이나 한 가지를 잡고 나아가는 날에야 대한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시작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때의 경우와 생각에 옳아보이는 것을 잡고 나아가면 끝에 가서는 그 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지금 당한 경우와 기회를 심상히 여기고 붙잡지 않으면 그의 신세는 방황에 영장하고 말 것입니다. 끝으로 한마디 말씀을 여러분에게 선사합니다. 어떤 신이 무심 중에 와서 홀출 내게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느냐 할 때에 나는 아무것을 하노라고 서숨치 않고 대답할 수 있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