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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의거로 도산은 더욱 일제로부터 경계대상이 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 한인들, 특히 미주 국민회계 인물들이 관여했던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처단 모의를 한 사실이 밝혀지자 일제는 도산과 신민회에 혐의를 두었다. 도산은 대성학교에서 피체되어 이동휘, 이갑, 이종호 등 여러 인사들과 함께 1909년 10월 26일에 헌병대로 끌려가 이토 히로부미 살해 배후 혐의로 취조를 받았다. 12월 20일 모두 무혐의로 풀려 나오긴 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세력을 일거에 타진(打盡)해 버릴 궁리를 하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신민회 회원들과 도산은 망명을 결심하였다. 망명전 이미 「거국가」를 지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였던 도산은 1910년 4월초 경기도 행주에서 목선을 타고 황해도 강연에 도착한 후 다시 중국인 상선인 소금배를 이용하여 중국 산동성 위해위로 탈출하였다. 이후 도산은 북경을 거쳐 7월 경 독일의 조계지였던 청도(靑島)로 갔다.

공립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던때의 도산
청도에 모인 애국지사들은 이른바 ‘청도회담'을 개최하고 독립운동 방침을 의논하였다. 많은 논란 끝에 만주의 길림성 밀산현에 농토를 매수하여 토지개간 사업을 일으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운동의 중심으로 만든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한편 국내에 남아있던 신민회 회원들은 1910년 9월부터 비밀리에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 三源堡)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경학사라는 지도단체를 결성하고 농지를 개척하였다. 또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을 통해 투철한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동시에 군사훈련과 교육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며 일본과의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서간도 개척사업은 자금의 절대적 부족과 계속되는 흉년으로 원활하게 진행될 수 없었다.

청도회담에 참가한 인사들은 길림 밀산(密山)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로 먼저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도산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때는 1910년 8월 24일경으로 병합조약 조인 소식을 전해들은 한인들은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신민회의 지도자인 도산의 러시아 입국은 일제를 긴장시켰다. 도산은 춘남리(스라우야니카)·니콜리스크 등 러시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지사들과 국민회 지회 및 학교 설립을 의논하고, 국권회복을 다짐하는 연설을 통해 동포들의 단결과 애국심을 호소하였다. 또 일주일에 3회 정도는 야학교에 나가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며 애국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청도회담에서 의논한대로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한 구체적 일정을 잡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도산은 조직적인 한인사회의 지도와 현실적인 독립운동 노선의 표방으로 러시아의 거류민회와 청년층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러시아에 체류하는 동안 도산은 기지개척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북만주 봉밀산 개척사업을 시찰하였다. 이미 공립협회 당시에 재러 한인사회에 진출한 정재관, 김성무, 이강 등 동지들에 의해 개척이 시작된 밀산부 봉밀산 기지에서는 이주민들에 의해 농업이 경영되었고, 숭무학교(崇武學校)가 세워져 군사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산은 재러 청년들과 함께 <청년근업회>를 조직하고, 연해주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는 시점을 최대한 활동, 신문 재간행·자선공제회의 운영·한인들의 귀화운동을 중점사업으로 진행하였다. 초기 러시아에 이주한 귀화 한인들은 대부분이 무식계층이고 언어가 소통되지 않아 러시아당국과 교섭은커녕 기본권리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당시 귀화 한인들은 무상으로 15데샤티나의 토지와 각종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어 많은 한인들이 귀화를 원하였으나 러시아 당국은 한인귀화의 조건을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었다. 도산은 러시아 당국에 귀화수속을 간단하고 쉽게 해줄 것과, 러시아 법규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집회 등을 어느 정도 묵인해줄 것, 그리고 새로 이주해 오는 한인들의 귀화를 계속 허락해 주고 그 절차를 유태인과 같이 취급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러시아에 체류하는 짧은 동안 재러 한인들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러시아 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한인의 권리획득을 위해 간단없이 활동했던 도산에 대해 일제는‘안창호는 블라디보스톡 재류 한인들의 수뇌(首腦)이며 한인들이 기획하는 모든 일들에는 안창호가 관련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도산은 원동사업의 진척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1911년 5월 말경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안정근이 머무는 북만주 목릉(穆陵)에 들려 농업투자 상황을 돌아본 뒤,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그를 거쳐 독일과 영국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0년 경술국치
1911년 <105인사건>발발
- 일제가 테라우찌 조선총독 암살음모 혐의로 민족운동가 700명 검거하고 105인에게 유죄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