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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원동지역에서도 흥사단운동이 필요함을 느꼈다. 흥사단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지혜·도덕을 닦는다는 수양을 목적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그런데 그 수양은 민족과 국가를 외면한 개인차원의 수양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민족독립과 국가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심신 훈련이다. 단원들은 덕목을 갖추고 이를 바탕으로 혁명사업과 사회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도산은 수차례 독립운동의 방략을 의논하는 가운데, 유망한 청년들에게 흥사단의 이념을 선전하고 단원 가입을 권유하였다. 도산의 방대한 독립운동의 계획과 그 이상에 감화를 받은 이들은 입단식을 거쳐 단원이 되었다.

그리고 1920년 9월 20일에 국내를 비롯한 중국·연해주·국내·일본을 관할 운동권으로 한 지부조직으로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로 정식 결성되었다.

흥사단 원동위원부 사업을 지도할 당시의 도산

1920년 12월 29일에 흥사단 제7회 대회를 처음으로 원동에서 개최하였고, 1921년 12월 6일에 개최된 반장회에서는 임시원동위원회 규정안과 임시원동편집국 규정안을 통과시키고 조직을 갖추어 나갔다. 민족의 장래를 인재양성에 두었던 도산은 그와 함께 초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던 열혈청년들과 중국에서 공부하는 학생 등, 주로 청년층을 단원으로 포섭하였다.

도산은 원동위원부 강론회를 수시로 개최하여 여러 가지 주제의 강연과 자유로운 토론을 진행하며 서로의 방략과 의론을 합치시켜 나갔다. 좌·우익간에 사상 논쟁과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을 때도 위원부에선는 단원간에 어떠한 사상논의나 주제든지 자유롭게 토론하며 공론을 세워 나갔다. 상해지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좌·우익의 싸움에서 원동위원부는 중립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각 운동 노선을 결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는 이상촌건설운동과 재정확보운동을 지속적으로 모색하면서 독립운동을 현실화하는 기초작업에 진력하였다. 국가 건설에 기여할 인재들이 전문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어학 등의 보습교육을 행하면서 흥사단의 주의와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1924년 남경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도산은 모범촌을 건설하기 위해 양자강 연안의 진강(鎭江)과 길림(吉林)·산해관(山海關)·금주(錦洲)·호도도(葫蘆島) 지역을 답사하였다. 또한 동경성과 경박호 연안을 왕래하며 그 지역의 땅의 상태(地味)와 풍토, 그리고 음료수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조사하였다. 이 외에도 기지 개척지로서 광동 지방과 필리핀·보르네오·싱가포르, 그리고 내몽고 지역까지 주목하였다. 이상촌 건설의 노력은 도산이 피체되기 1년 전까지 지속되어 도산은 김규식과 함께 인도네시아 보루네오섬에도 한인들을 이민시켜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계획하였다고 한다.

도산은 그간의 독립운동의 다양한 노선을 수용하고 실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전환의 모색이 될 유일당 조직운동과 모범촌 건설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해 줄 힘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1924년 7월 도산은 상해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도산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미주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조직을 지도하였다. 동시에 한인사회를 순방하면서 독립운동의 주의정신을 일치시키고 원동에서 진행기키고 있는 사업내용을 설득하였다. 12월 21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던 환영회에서 도산은 3·1운동 이후의 여러 독립운동들은 국부적 활동에 불과했음을 반성하고, 그간 “우리 가운데서 준비독립운동자를 무시하는 이도 없지 않으나 우리는 실제적 준비를 하여 장래에는 유계획·유조직한 독립운동을 하여야 되겠습니다”라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동족간의 분쟁을 하지말고 단합과 통일로 동족을 사랑하고 전문지식을 갖고 계획을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실행할 것과 임시정부에 인두세를 납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 중국 동부지역에 모범촌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실업기관 조직에 전력해야 할 것이며, 모든 한인들은 일본과의 관계 단절(납세 거부·상거래 거부·명령불복·일본 정치가들의 소멸 등)과 일제 시설(철도·교량·선창·무기창고·관청·병영 등)의 파괴 공작 등을 독립되는 날까지 수행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