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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군·정부 수뇌들을 일시에 쓰러뜨린 쾌거의 날이며, 도산이 일제에 피체된 날이기도 하다. 이날 도산은 조상섭 목사의 손자 돌잔치에 갔다가 소년동맹단에 기부금을 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소년동맹 단장인 이만영 소년을 만나려고 이유필(이만영의 부친)의 집으로 갔다가, 교민단장 이유필의 집을 급습한 프랑스 조계 공무국과 일제 영사관 합동 경찰에 의하여 연행되었다.

도산은 피체되기 전인 1932년 1월 16일자로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일찍 모든 것을 희생하고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작정한지 오래였고 가정의 행복을 희생한지 오래였을 뿐더러 당신도 우리 민족을 위하여 희생을 당하는 바이라. 이미 혁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작정하고 오랫동안 희생을 달게 여기며 온 바에 이제 어떤 고통을 받던지 어찌 원망할 것이 있으리오. 나는 더욱이 여러 동지와 동포에게 빚진 것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다시는 집이나 무엇이나 사사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뿐입니다”라고 하여 마치 앞날을 예견하듯 비장한 각오를 표하였다.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 도산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인도되어 심문을 받은 도산은 그 해 6월 7일 인천으로 호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심문조사 후 4년 실형을 언도 받았다. 도산은 공소권을 포기하고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다가 형기를 22개월 남기고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하였다. 도산은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일경의 감시와 방해를 무릅쓰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한 후 평남 강서군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손수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때 도산은 모든 활동을 금지당한 상태였지만 국내 흥사단 조직인 <동우회>의 민족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된 이래 민족주의계열로서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 <동우회>와 <흥업구락부>뿐이었다. 당시 동우회는 학계·언론계·산업계 등에서 활약하는 부르주아 계층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주로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일제는 그들을 큰 위협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동우회는 1931년 이후 조직을 확대하여 서울, 평양, 선천, 안악, 강서, 부산, 신의주 등으로 단 조직의 기반을 마련하고 1933년에는 약법을 수정하여 ‘대공'의 정신을 적극 발휘하여 민중의 행복을 위하여 분투 노력할 것과 민중교양과 협작운동을 통한 ‘사회공작'활동을 전개함을 기본활동으로 규정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동우회의 이러한 변화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더욱이 대륙침략을 단행하고 한민족에게 황민화와 민족말살을 획책했던 시점에서 일제는 동우회 회원들에게 민족운동 포기에서 나아가 일제에 충성을 맹세케 하는 확실한 전향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동우회를 신간회 해소 이후 가장 유력한 단체로 부각시키면서 동우회가 “표면 수양단체를 가장하여 교묘히 당국의 취체를 면하고 이면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집요(執拗)한 운동을 계속해 왔다”고 주목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6년에 총독부에서는 동우회 이사회 소집통지서를 일본어로 쓰고 모든 회의도 일본어로 진행하라고 강압하자, 동우회는 일제의 태도 변화에 대한 대책을 숙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1937년 6월 동우회 회원들에 대한 일제의 총검거가 시작되었다.

도산은 송태산장에서 피체되어 서울 종로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동우회사건으로 회원 181명이 피체되었고, 1심·2심을 거쳐 41명에게 치안유지법 및 제령 7호 위반의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도산은 경기도 경찰부에 수감되어 종로 경찰서에서 동우회와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았다.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도산이 숙환인 위장병과 폐결핵 증세로 위급한 상태에 빠지자 조선총독부에서는 12월 24일 시급히 도산을 보석시켜 경성 제국대학병원에 입원하게 하였다.

당시 도산은 위하수증·간경화·만성기관지염 증세로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친형 안치호와 생질인 김순원 등 몇 몇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938년 3월 10일 0시 5분에 6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도산이 서거한 이후에도 일제는 흥사단을 전향시키고자 온갖 회유 및 탄압을 가하였다. 이를 이기지 못하고 몇몇 단원들의 명의로 1938년 6월 18일에 ‘전향'성명서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민족운동단체인 흥업구락부도 같은 해 9월 3일자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들의 전향성명서의 내용이 거의 동일한 문장인 것으로 보아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총독부가 작성한 원안에 그대로 서명을 강요받았거나, 혹은 강압에 의해 작성된 것이었다. 일제는 동우회와 흥업구락부의 검거로 민족주의단체는 거의 박멸(撲滅)되었다고 보았다.

도산이 작고한 후 일제는 동우회 사건에 대해 1939년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으나 검사의 공소로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41명 기소자 전원이 5년 내지 2년의 실형 혹은 집행유예를 언도 받았다. 그러나 1941년 11월 17일에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 판결이 내려져, 동우회사건은 일어난 지 4년 5개월만에 종결되었다.

 
1936년 손기정,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우승.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남경대학살.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41년 일본군, 하와이 진주만 기습·공격. 미국·영국 대일본선전포고.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