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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독립운동에서 분출된 온 민족의 자주독립의 염원을 모아 1919년 수립된 이래 1945년까지 27년간 해외에 존재하였다. 임정은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하에서는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3·1 운동의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실질적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던 초창기 임정에 참여한 도산은 끊임없이 조직과 자금, 방략을 공급하며 헌신 봉사함으로써 초기임정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1. 임시정부의 설립
2. 임시정부의 통합
3. 임시정부의 분열과 도산의 사임

1919년 터져나온 3·1 독립운동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우리 민족에게 `독립 정부 수립' 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국내외 도처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상해의 임시 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국내 13도 대표가 국민 대표회를 소집해 만든 한성정부이다.
당시 도산은 41세의 나이로 미국에 거주하며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실력 배양을 통한 독립운동을 구상하며 이를 위해 노력하는 중 이었다. 그는 3. 1 운동 소식을 듣고 곧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장의 명의로 국내외 모든 동포가 함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결의안과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우선, 미주 한민 대표로서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상해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난 1919년 6월 28일, 안창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했다.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프랑스 조계지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청년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정무를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시절의 도산
안창호는 제일 먼저 정보와 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에서 지방 행정 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비밀 조직인 연통제를 실시하고, 연락 업무를 위해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대한민국 적십자회를 결성하였으며,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첫 임시정부 청사 독립신문 창간호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 한성임시정부,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정부로 대표되는 세 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도산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권회복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의 과제를 실현시켜줄 실직적인 국민의 총집결체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결국 비교적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상해에 임시정부를 두기로 하고, 1919년 9월 6일 통합헌법을 성립시켜 9월 11일 통합임시정부를 출범시키게 되었다.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더불어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등이 정해졌다. 오랜 노력 끝에 각지의 독립 운동가들이 참여한 하나의 임시 정부가 세워진 것이다. 임시정부의 통합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도산은 "오늘 나의 기쁨은 극도에 달해 마치 미칠 것 같다" 라고 감격을 표현하기도 했다. 한성 정부안에 따라 임시 정부를 세우면서 도산은 이전의 내무총장에서 노동국총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동국총판은 낮은 자리였지만 도산은 자리에 상관하지 않고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임시정부 관할 아래로 끌어들이고자 각 지역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교섭활동을 벌이는 등 단결에 힘썼다.
임시정부 통합한 후 처음 맞은 신년축하식의 임시정부 요인 및 직원들
1920년 1월 3일 도산은 신년축하회 석상에서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통일)」에 대한 연설로써 독립운동의 확실한 방침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도산은 장기적인 독립투쟁을 수행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재정 확보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정부가 정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는 국민의 세금이 정부 재정의 기반이 되어야 하고, 납세를 위해서 국민은 일정수입이 보장되는 직업을 가져야 하며, 한인들은 모두 군적(軍籍)에 등록하여 유사시에 군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른바 `국민개납', `국민개업', `국민개병'을 독립운동의 지도 방침으로 세웠던 것이다.
도산은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 지휘부로 올려놓고자 각 방면으로 전력하였으나, 임시정부는 곧 내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의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는 임시정부를 혼돈으로 몰아갔다.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을 두고 논란이 거듭되면서, 이승만 대통령 취임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박용만의 외교총장 취임 거부, 북경에서의 반임정운동 등으로 진전되면서 임시정부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도산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해 줄 것과 개인의 비난이 정부의 비난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정국을 수습할 수 없게 되자, 도산은 1921년 5월에 노동국총판을 사임하고,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였다. 도산은 거의 침식을 잊고 각 방면으로 권유하며 원근 각지로 연락에 취하였다. 위기에 처한 독립운동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국민적 공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교섭하던 도산의 노력이 드디어 그 결실을 맺어 1923년 1월 초부터 5월까지 각 운동단체의 124명의 대표들이 대표권을 인정받은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도산은 임시정부를 그대로`고수'하자는 의견을 내세워 "장차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계속하지 않을 것인가, 만약 계속한다면 현 임시정부는 이를 존속하되, 다만 각 원의 개조로 끝내고, 각 파와 단체를 통일하자"고 주창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5월 15일 63회 회의를 끝으로 독립운동계의 노선 차이만을 드러낸 채 결렬되었다. 국민대표회의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분산되어 갔으나 도산은 좌절하지 않고 민족유일당 결성에 착수하여 독립운동의 계파와 노선을 초월하는 대동단결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산의 유일당운동은 반임정세력의 집결지인 북경을 시작으로, 중국 관내 주요 지역과 만주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도움말
1. 연통제
연통제는 1919년 7월 임시정부 국무령 제 1호로서 공포·실시되었다. 국내 각지의 지하 조직으로서 임시 정부와 연락하는 기관이었으며 각도에 독판을 두고 그 밑에 내무·재무· 교통·경무 등의 사(司)가 있고, 경감·장서·참의·참사 기수 등의 직명이 있어 지방 행정 기관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중요한 목적은 선전과 연락이었고, 장래에 다시 민중운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는 것과, 임시정부의 재정을 모집하는 일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2. 임시사료편찬회
1919년 7월에 도산은 임시정부의 한 기관으로 임시사료편찬회가 설치되었다. 일본의 침략 행동을 분석하여 앞으로의 선전운동에 자료로 삼기 위한 한일관계 사료의 수집과 3·1 운동의 자세한 기록을 모아 선전 자료로 삼는 동시에 많은 희생자들의 공로를 빠짐없이 기록에 남겨두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