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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5조약(乙巳五條約) 을 통해서 대한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 일본은 본격적인 민족교육말살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육관계법이 제정되어 각 관·공립 학교마다 일본인 교원이 배치되었으며 교육의 내용 또한 자주독립을 고취하는 어떠한 내용도 가르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사립학교, 야학 등 민족교육기관은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만 설립인가를 받을 수 있었고 그나마 설립된다 하더라도 통감부의 말 한마디면 언제든 폐쇄될 수 있어 민족교육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식민지교육은 식민지통치의 핵심적인 부분이므로 일제는 혈안이 되었다. 민족교육을 말살하거나 왜곡시키지 않고서는 식민지의 유지 하기 위한 교육 추진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산은 독립운동 방략의 핵심으로 교육을 강조하며 평생 동안 여러 개의 학교를 설립하였고,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개의 단체를 조직하였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격완성', `인격훈련', `인격수양' 을 강조하며 가는 곳마다 사회교육운동을 추진하였다. 식민지 교육이 식민지제도의 핵심적 부분이라면 이에 대항하는 민족 독립운동 또한 핵심적 요소를 민족교육에 두는 것은 당연하다. 민족독립운동의 핵심적 기초를 교육에서 찾은 도산의 관점은 이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 점진학교
2.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
3. 흥사단

1932년의 점진학교와 학생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교육의 움직임은 강화도조약 이후, 독립협회의 활동을 통해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독립협회는 근대화를 통하여 자주독립의 내실을 갖춰야만 비로소 완전한 독립국으로 될 수 있다고 천명하고 근대 교육체계의 확립을 통하여 국민을 개화시키며 근대화를 계속 추진할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고 주장하였다. 근대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의 역량을 양성함으로써 쓰러져가는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자는 교육운동은 독립협회와 그 뒤를 잠시 이은 만민공동회의 노력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그와 아울러 시대적 상황에 의하여 각성한 지도자들과 개화된 지식인들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학교설립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도산이 1899년에 평안도 강서군에 점진학교를 세운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이곳은 우리 나라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최초의 학교임과 동시에 최초의 남녀공학이기도 했다. `점진'이라는 학교명에는 기회를 기다리며 독립을 준비하는 힘을 기르자는 도산의 뜻이 담겨 있었다. 도산은 점진학교의 교장으로서 오전에는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오후에는 하천을 메우고 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드는 황무지 개간 사업에도 종사하였다.
대성학교 교직원 및 학생일동
1905년 1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강제로 `을사5조약' 을 늑결하고 식민지 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목적으로 미국에 갔다가 `공립협회(共立協會)' 등의 교민지도활동을 벌이고 있던 도산도 이러한 국내상황에 발맞추어 국권회복운동을 지도해 나갈 조직을 만들고자 귀국하고 이갑(李甲) 등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에 평양에 세워진 `대성학교' 는 이러한 신민회 활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중등 교육 기관이다.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중심체로서 도산의 교육 이념을 구현하는 동시에 정치·군사· 과학 등에 중점을 두고 민족 운동 투사를 양성하는 본거지였다. 특히 도산은 이 곳에서 `성실'을 근본으로 하는 인격 도야에 중점을 두고 민족운동의 기본 이념을 주입하고자 분투하였다. 학교 운영뿐만 아니라 출판 사업을 통해서도 도산의 교육 운동은 이루어졌다. 도산은 서울·평양·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이라는 출판사를 세우고 민족의식을 높이는 책을 출판해서 판매하였다.
또한 1909년에는 `청년 학우회' 라는 청년 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청년 학우회는 바른 정신을 기르기 위한 수양 단체로서 무실·역행·자강·충실· 근면·정제·용감을 기본 정신으로 하여 한 가지 전문 학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 자격을 구비하며, 매일 덕·체·지 3육의 수양을 한 가지씩 행하여 수련함으로써 민족 계몽 운동과 구국 운동을 이끌어나갈 지도자를 키우고자 하였다.
흥사단 4차 연례대회 기념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정신은 1913년 5월 13일 흥사단의 창립으로 계승된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또다시 망명길에 오른 도산은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이끄는 한편 수양단체인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고, 덕· 체·지의 3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작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 이라는 것이 창립 당시의 약법에 표시된 목적 조문이다. 즉, 흥사단은 단원들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지혜·도덕심을 닦는다는 수양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인데, 그 수양은 민족과 국가를 외면한 개인차원의 수양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민족독립과 국가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심신훈련단체인 것이다.
흥사단이 설정하고 있는 '수양' 이라는 뜻은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민족의 발전을 전망하는 대의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도산의 교육 이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며, 도산이`우리 민족이 완전히 부흥하여 생존번영을 누리고, 나아가서 전체 인류사회의 공존공영에 공헌을 짓는 대사명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흥사단의 주의·주장이다'라고 할 정도로 흥사단을 중시한 까닭이다. 흥사단 단원들은 교양과 계몽에 필요한 강연을 듣고 하루에 한 쪽 이상의 독서와 3분 이상의 운동을 수련 과제로 정하고 실천하며 자기 수양에 힘썼다. 또한 함께 저축하여 경제력을 키우기도 하였다.
흥사단은 도산의 필생에 걸친 사업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에 있을 때에도 그는 중국 본토와 만주, 소련의 연해주 등을 포함하는 원동 지역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세웠다. 이 곳에서 많은 청년들이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도산은 중국 남경(南京)에서 일제 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청년들을 위해 동명학원(1924)을 설립·운영하였다. 도산의 뛰어난 조직력으로 여러 지역에 단원들을 확보하고 발전을 거듭한 흥사단은 1948년 광복 이후 본부를 서울로 이전하여 지금까지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도움말
1. 을사5조약(乙巳五條約)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일명 제2차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을사보호조약이라 명칭하여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임을 강조하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여 사실상 우리나라를 자신들의 반식민지 국가로 전락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2. 독립협회
서재필· 이상재·남궁억·안경수·권재형 등 자주독립을 강조하던 재야 개화파 세력이 중핵이 되어 1896년 7월 2일 창립된 개혁파 단체이다. 이 단체는 독립문 건립운동을 시작했다가, 토론회 운동을 거쳐 열강의 이권침탈에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전제 군주국가 체제를 의회 설립을 통하여 입헌군주국가 체제로 변혁하기 위한 대대적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3.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민중대회. 1898년 3월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러시아인 탁지부(度支部) 고문과 군부 교련사관의 해고를 요구하고, 이승만(李承晩)·홍정하(洪正夏) 등 청년 연사가 열렬한 연설을 하여 대중의 여론을 일으켰다. 이 대회는 계속 개최되어 그 해 10월에는 윤치호(尹致昊)를 회장으로 선출, 정부의 매국적 행위를 공격하고 시국에 대한 개혁안 6 개조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보수적 관료들의 반대로 이에 관계한 대신들만 파면되고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독립협회는 해산된 후에도 얼마 동안은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였다.
4. 동명학원
동명학원 창립기념 사진
동명학원은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전개한 사업으로, 1924년 설립된 학교이다. 일제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되자, 많은 청년들이 구미 또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상해와 북경, 남경 등지로 몰려드는 청년들에게 교육의 방향을 잡도록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칠 필요성이 절실해 졌다. 동명학원은 먼저 어학강습소를 설립하여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쳐 해외 각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예학과정을 강습하고자 했다. 또한 군사학·병식체조 등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흥사단의 주의와 정신을 가르치고 지도해 청
년들이 구미나 중국의 어느 대학이든지 유학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배워 민족국가 건설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5. 흥사단(興士團)
흥사단(興士團)은 도산 안창호가 민족의 자주 독립과 인물 양성을 위해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 단체이다.
흥사단은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독립운동 단체로서 국권 회복에 기여할 인물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운영 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해방 후에는 국민계몽 운동 단체로서 금요강좌의 개최와 월간지 『새벽』의 발간 등을 통하여 자유와 민주사상을 고취하고 4·19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창단 50주년을 맞은 1963년부터는 미래 한국 사회 지도자와 흥사단 후계 세대 양성을 위한 청년·학생운동으로 '흥사단 아카데미 운동'을 전개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들은 1980년대 들어 사회 각계에서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여 한국 사회의 민주 발전에 기여하였다. 1990년대부터 활발하게 전개된 한국 사회의 각양 시민 운동은 이러한 '아카데미 운동'을 통하여 배출된 인적 자원과 경험을 토대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들은 각 분야 시민 운동의 지도적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흥사단 홈페이지 : http://www.yk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