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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40여년 동안 세차례에 걸쳐 망명길에 오른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 사회에서도 그는 민족의 지도자로서 진실과 모범으로 동포들을 이끌어 독립을 위한 기반을 다지고 우리 민족의 입지를 지켜나갔다. 첫번째는 약관 20세의 청년으로 평양 쾌재정에서 독립협회가 주최한 연설에서 명성을 떨친 도산이 1902년 10월 서둘러 성례한 부인 이혜련과 같이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 활동을 벌이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샌프란시스코에 건너간 도산은 학업에 전념하기보다는 어렵게 사는 교민을 위한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5년에 걸쳐 미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두 번째는 귀국 후 청년학우회와 신민회를 통하여 대한제국 최후의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도산이 국망을 목전에 둔 1910년 4월에 망명길에 올라 시베리아 연해주의 한인사회를 순방하고 1911년 봄 다시 도미한 것이다. 이후 1910년대 미주에서의 민족운동은 국외 한인의 조직적이고도 활발한 민족운동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 번째 망명은 일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고, 또한 마지막 체류가 되었다.

1. 1차 망명
1) 한인친목회 활동
2) 공립협회 활동
2. 2차 망명
1) 시베리아 연해주에서의 민족운동
2) 대한인국민회 활동

한인친목회 활동
1902년 9월 도산은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노동일을 하며 소학교를 다녔다. 도산은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어려운 생활가운데 미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으면서도 단합하지 못하고 분쟁을 일삼으며 지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한다. 자신의 학업보다는 동포들의 생활개선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 도산은 뜻을 같이하는 이강·정재관·김성무 등과 함께 1903년 한인 친목회 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동포들의 생활지도와 직업 알선에 힘썼다. 1903년 말에는 일자리를 찾는 동포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로스앤젤레스 근교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한인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해 주고 성경과 영어를 공부하였다. 한인친목회는 발전을 거듭하여 1905년 4월에는 미주 한인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로 발전되기에 이른다.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하는 도산
공립협회 활동
공립협회 창립 동지들
공립협회는 1905년 11월 을사5조약 전후로부터는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각 지방에 퍼져 나간 한인사회를 결속시키고자 각지에 지방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도산이 1차로 미국을 떠나 귀국하는 1907년까지는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하여 리버사이드·로스앤젤레스· 레드랜드·록스프링 등 5개 지회가 성립되고 49명으로 시작한 회원이 600명에 달하기까지 하였다. 11월에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가에 회관도 마련하였으며 11월 20일부터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간하였다. 『공립신보』는 공립협회가 추진하던 주요 사업의 하나로 국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보도하며 그 불법성을 규탄하는 한편, 한인의 당면급무인 교육과 실업진흥, 독립전쟁의 준비 등을 강조하는 기사와 논설을 제개하여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공립신보』

도산이 신민회를 결성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안 미주 공립협회는 하와이의 한인단체들과 통합하여 국민회로 재편되고, 신민회와 연계 하에 비밀리에 국외 기지개척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시베리아 연해주에서의 민족운동
1907년 귀국하여 신민회를 결성하고 국내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이던 도산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로 일제로부터 경계대상이 되어 다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도산은 유동열·신채호· 이동휘·이종호·이강 등 신민회 동지들과 중국 청도(靑島)에 모여 독립운동 방략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대체로 해도간이라고도 칭하는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우선 북만주 밀산에다 농지를 개간, 사관학교를 세우는 일부터 착수하기로 하였다. 청도회담에 참가한 인사들은 길림 밀산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로 먼저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도산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때는 1910년 8월 24일경으로, 병합조약 조인 소식을 전해들은 한인들은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도산은 춘남리(스라우야니카)·니콜리스크 등 러시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지사들과 국민회 지회 및 학교 설립을 의논하고, 국권회복을 다짐하는 연설을 통해 동포들의 단결과 애국심을 호소하였다. 또 일주일에 3회 정도는 야학교에 나가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며 애국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청도회담에서 의논한대로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한 구체적 일정을 잡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도산은 조직적인 한인사회의 지도와 현실적인 독립운동 노선의 표방으로 러시아의 거류민회 사회와 청년층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러시아에 체류하는 동안 도산은 기지개척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북만주 봉밀산 개척사업을 시찰하였다. 이미 공립협회 당시에 재러 한인사회에 진출한 정재관·김성무·이강 등 동지들에 의해 개척이 시작된 밀산부 봉밀산 기지에서는 이주민들에 의해 농업이 경영되었고, 숭무학교(崇武學校)가 세워져 군사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산은 재러 청년들과 함께 청년근업회를 조직하고, 연해주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는 시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신문 재간행·자선공제회의 운영·한인들의 귀화운동을 중점사업으로 진행하였다. 초기 러시아에 이주한 귀화 한인들은 대부분이 무식계층이고 언어가 소통되지 않아 러시아당국과 교섭은커녕 기본권리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당시 귀화 한인들은 무상으로 15데샤티나의 토지와 각종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어 많은 한인들이 귀화를 원하였으나 러시아 당국은 한인귀화의 조건을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었다. 도산은 러시아 당국에 귀화수속을 간단하고 쉽게 해줄 것과, 러시아 법규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집회 등을 어느 정도 묵인해줄 것, 그리고 새로 이주해 오는 한인들의 귀화를 계속 허락해 주고 그 절차를 유태인과 같이 취급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러시아에 체류하는 짧은 기간 동안 재러 한인들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러시아 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한인의 권리획득을 위해 간단없이 활동했던 도산에 대해 일제는`안창호는 블라디보스톡 재류 한인들의 수뇌(首腦)이며 한인들이 기획하는 모든 일들에는 안창호가 관련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도산은 원동사업의 진척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1911년 5월 말경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그를 거쳐 독일과 영국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도산이 없는 동안 국민회는 1910년 5월에 하와이 한인단체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고 있었다. 도산은 1912년 2월 해외 한인사회를 조직적으로 통합하여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이익을 증진시킬 중추기관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발족하였다. 중앙총회장에 선출된 도산은 북미는 물론 하와이·멕시코·쿠바·만주·시베리아 등지의 지방총회를 지휘하며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한편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간행하여 일제에 의해 억압된 민족언론을 되살리는 동시에, 언론을 통해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미국무성과 캘리포니아 주 정부로부터 자치단체의 자격과 권위를 인정받아 한인사회의 자치와 권익을 신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유학생과 망명 애국지사들은 여행권을 갖지 않고도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으로 입국이 가능하였고 영주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1915년에는 클래어몬트 한인국어학교(학생양성소)를 발전시켜, 한인 2세에게 잊혀져 가는 모국어를 교육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계승·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1917년 1월 대한인국민회 동지들과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우선 농업경영에 착수하여 민족기업을 일으키는 한편, 국제무역에서 신용거래를 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는 등 여러 사업을 전개하였으나, 불행히도 1927년에 파산하고 말았다.
또 도산은 1917년 6월부터 12월까지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이승만과 박용만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와이를 방문하고 교민사회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는 뉴욕에서 개최되는 소약소국동맹회에 박용만을 대표로 참석케 하여 제1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문제를 제기하였다. 1918년에는 멕시코 한인들의 초청을 받아 멕시코를 방문하였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급한 임금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멕시코 한인동포사회를 통합시키고, 학교 및 실업회사 설립 등을 독려한 뒤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클래어몬트 학생양성소 멕시코 교민들과 함꼐 한 사진
도산이 중앙총회장으로 복무하며 지도해 나간 1910년대 대한인국민회는 민족주의 이념하에 제도와 운영은 민주주의를 구현함으로써 미주 한인사회는 물론 전 해외의 한인사회의 안녕과 자치를 신장하면서 조국독립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활동하여 한국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에 큰 공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