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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 된지 2년 후인 1878년에 태어났다. 일제의 군사적 위협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조선의 개항은 국권상실이라는 심각한 위기를 내포하고 있었고, 그것은 도산이 22세가 되던 해인 1910년에는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민족사 가운데 일제의 식민지통치는 가장 불행하고 혼란스러웠던 시기로, 도산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독립시키기 위한 수많은 운동에 평생을 바친 위대한 지도자이다.
물론, 그 시대에 국권회복에 생애를 바친 민족의 지도자들은 비단 도산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산의 독립운동 방략에는 여타 민족 지도자들과 차별되는 부분이 있다. 도산의 독립운동 방략의 특성은 우리 민족의 전도를 내다보는 총체적 접근이다. 일면적인 무력투쟁이나 외교적 노력 일변도에 빠지지 않고, 무력투쟁·외교노력·경제운동·교육운동을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인 독립운동이라는 것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빼앗긴 주권을 당장에 찾기 위한 투쟁과 전쟁, 곧 `즉자적 대응' 을 주장한 것에 반해 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를 실천해 나간 혁명가였다. 도산은 일제에게 국권을 탈취당한 근본 원인이 조선과 대한제국의 총체적 국력쇠퇴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성급한 무력투쟁은 감정적 모험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도산의 이러한 역사의식이 옳았다는 것을 우리는 독립투쟁 과정과 해방 이후의 진행상황을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다.

1. 독립협회
2. 신민회
3. 국민대표회의
4. 유일당 운동과 한국독립당
5. 이상촌 건설 운동

독립협회 평양지회 회원으로 활동할 때의 모습
      (가운데가 도산)
1897년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사회운동에 참여한 도산은 필대은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회를 설립하는 데 참여하였고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3년 간 경기·황해·평안 각도를 순회하며 연설하였다.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청년 도산은 근대화론과 민주주의사상을 접하고, 그 영향 아래 자신의 정치 및 사회사상을 키워 나갔다.
1898년 7월 25일(음력) 광무황제의 생신을 맞아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도산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설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쾌재정 연설이다. 이 연설에서 도산은 정부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민중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 독립협회는 친러수구파 정부에 의하여 불법화됨으로써 해산되어 독립협회의 민족운동은 일단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독립협회의 실패 원인을 국민들의 미각성과 교육부족으로 본 도산은 고향으로 돌아가 신식학교인 점진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렇게 20세의 젊은 나이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적극 활동했을 뿐 아니라, 그 해산 직후에는 고향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그가 나이에 비해 매우 선각적이고 선구적인 애국청년이었고, 민족주의자·개화주의자 청년이었음을 잘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태극서관 광고
신민회 결성당시 도산의 모습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오조약을 늑결하여 한국을 일제의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한 침략 행위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었다. 미국에 거주하며 공립협회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도산은 1907년 2월 20일 일본을 거쳐 귀국하여 발빠르게 애국지사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4월경 상동청년학우회, 대한매일신보, 구한말 군인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지사들과 결의하여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봉건적 구사회사상과 관습을 혁신하고 국민을 유신케 하며, 국권을 회복하여 근대적 자유문명국가를 건설함을 목적'으로 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도산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교육, 언론, 실업, 학회 등 각 방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근대교육과 애국교육을 실행하였으며, 1909년 8월에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서울·평양·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여 서적 판매와 함께 출판사업을 계획하였다. 태극서관은 신교육 보급만이 아니라 신민회 회원들의 비밀연락처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瓷器會社)를 설립, 민족산업을 육성하여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도산은 이후에도 자본력이 부족하여 산업 투자가 어려운 민족현실에서 한인들의 소자본을 주식형태로 모아 투자하는 많은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일제의 주권 침탈행위가 심각해지자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배출하여 기회가 올 때에 독립전쟁에 대비할 전략을 세우고, 국내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가장 적합한 기지로 선정하였다. 이와 같은 신민회의 민족운동은 그 후 3·1 운동을 포함한 모든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을 공급한 매우 중요한 구국활동이었다
도산은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 지휘부로 올려놓고자 각 방면으로 전력하였으나, 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의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로 곧 내분에 휩싸이고 만다.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을 두고 논란이 거듭되면서, 이승만 대통령 취임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박용만의 외교총장 취임거부, 북경에서의 반 임정운동 등으로 진전되면서 임시정부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도산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해 줄 것과 개인의 비난이 정부의 비난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였으나 정국을 수습할 수 없게 되자 1921년 5월에 노동국총판을 사임하고,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였다.
위기에 처한 독립운동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국민적 공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교서하던 도산의 노력이 드디어 그 결실을 맺어 1923년 1월 초부터 5월까지 61개 단체 124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도산은 임시정부를 그대로`고수'하자는 의견을 내세워 "장차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계속하지 않을 것인가, 만약 계속한다면 현 임시정부는 이를 존속하되, 다만 각 원의 개조로 끝내고, 각 파와 단체를 통일하자"고 주창하였지만 결국 5월 15일 63회 회의를 끝으로 독립운동계의 노선 차이만을 드러낸 채 결렬되었다.
비록 실패로 되돌아가긴 했으나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는 당시 독립운동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현실을 각성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임시정부의 위상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확실한 지침을 주어 임시정부를 새로이 개혁케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 독립당 결성을 추진할 당시의 도산
국민대표회의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분산되어 갔으나 도산은 좌절하지 않고 민족유일당 결성에 착수하여 독립운동의 계파와 노선을 초월하는 대동단결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산의 유일당 운동은 반 임정세력의 집결지인 북경을 시작으로, 중국 관내 주요지역과 만주지역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운동계의 통합과 대동단결을 위한 도산의 노력은 쉽사리 성사되지 않았다.
아울러 한인 내부의 문제로만 전선통일을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에 직면한 도산은 중국의 혁명동지들과 공동의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도산은 중국 당국과의 교섭을 위해 1931년 7월 10일 <한인각단체연합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들 여러 단체의 대표들은 중국 당국 인사들과 항일연합전선 구축을 위한 교섭을 진행하였다.
1932년 4월 도산은 피체되었으나, 유일당운동과 중국과의 대일전선통일운동은 한국독립당의 이유필·송병조, 북경·천진 지역의 민족운동가 대표 김규식, 만주 조선혁명당의 최동오에 의해 계속 진행되어 1932년 10월에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11월에는 <중한민중대동맹>으로 결성되었다.
국민 대표 회의가 실패로 돌아간 뒤 유일당 운동과 한국 독립당 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도산은 미래를 내다보며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산은 1924년 미국의 흥사단과 대한인 국민회의 활동을 정비하고 이상촌 건설에 필요한 동지와 자금을 얻어 1926년에는 다시 상해로 와 이상촌의 후보지를 물색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상촌 건립의 목적은 1)해외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삼을 것, 2)해외에서 성공하여 귀국을 원하되 일본 통치하에 들기를 원치 않는 이들의 집단 생활지로 할 것, 3)말보다도 실지적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도산의 평소의 교육 철학에 의거하여 농촌 생활 내지 농촌 도시 생활의 표본을 만들 것, 4)해외 동포로 하여금 모국의 문화를 보존하게 할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산과 강이 있고 땅이 비옥한 지점에 200가구 정도를 살게 하며 도로망과 하수도, 상수도 등을 현대적으로 시설하고 가옥도 한국 건축의 특징을 살리면서 현대식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며 공동 시설로 공회당, 여관, 학교, 운동장, 우편국, 협동 조합 등을 두고 공회당 안에는 오락실, 담화실, 도서실, 부락 사무소를 두어 모든 시설이 협동 생활 훈련의 기관이 되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 이상촌으로 농촌 생활의 모범 마을이자 독립 운동의 근거지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도산은 만주가 이상촌의 건립에 알맞다고 생각했으나 일본이 만주로 점점 세력을 뻗쳐 오면서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어 만주에 이상촌을 세우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도움말
1. 독립협회
서재필, 이상재, 남궁억, 안경수, 권재형 등 자주독립을 강조하던 재야 개화파 세력이 중핵이 되어 1896년 7월 2일 창립된 개혁파 단체이다. 이 단체는 독립문 건립운동을 시작했다가, 토론회 운동을 거쳐 열강의 이권침탈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전제 군주국가 체제를 의회 설립을 통하여 입헌군주국가 체제로 변혁하기 위한 대대적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2. 위임통치안
이승만이 국제 연맹에게 조선을 대신 통치할 것을 요청한 일은 임시 정부의 분열을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