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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과 근대 사회의 개막
2.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 발발
3.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발발

4. 1894년, 동학 농민전쟁

5. 1894년 7월 27일, '근대화 원년'-갑오개혁 실시
6.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
7.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고종황제 즉위
 
일본과 불평등 강화도 조약 체결, 전격 문호 개방
1876년 2월 27일 조선은 일본과 한.일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쇄국정책을 주장해오던 대원군이 권력투쟁에 밀려 권좌에서 물러나자 이러한 국내 정황을 탐문하고 있던 일본은 지난해 9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수호조약을 맺을 빌미를 만든 뒤 다시 올 초 8척의 군함에 다수 병력을 태우고 강화도에 나타나 조약체결을 강요해 왔다. 한.일 수호조약의 체결은 양국 대표가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약문에 조인하고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강화에 있는 한 학교에서 조약체결 기념식을 하고 있는 일본군

강화도 조약 비준서

이 조약은 일본의 강압 아래서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조약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모두 12개조로 되어 있는 이 조약의 내용에는 부산 외에 두개의 항구를 개방하여 통상을 허용할 것,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할 것, 조선에서 일본화폐를 통용시키고 관세를 없앨 것…등이 포함되어 있다. 즉,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번 강화도 조약체결을 계기로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을 시작하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서구문물을 수용하는 개화정책도 추진될 전망이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듯이 문호의 개방과 함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구식군대 폭동, 대원군 복귀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
1882년 6월 9일 민씨 정권이 일본인 교관을 채용하여 훈련시킨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우대하고, 구식 군대를 차별 대우한 데 대한 불만이 폭발, 구식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구식 군인들은 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하고, 정부 고관들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한편,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중들이 합세한 가운데, 민씨 정권의 고관들을 살해한 뒤 군란을 피해 달아나는 일본 공사 일행을 인천까지 추격하였다.
사태는 더욱 확대되어 이들은 대궐에 까지 난입하였으며 민씨척족의 최고 권력자인 민비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당황한 민비는 충주로 피신하여 종적을 감췄고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자취를 감춘 민비의 사망을 발표하여 봉기 군중들을 무마시키는 한편 군제 개혁을 단행하여 5군영의 복설을 명하고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삼군부를 복설하는 등 민씨세력의 개화정책을 모두 백지화시켰다.
흥선대원군
:임오군란, 그 뒷이야기/
1882년 7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이를 둘러싸고 청과 일본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내의 일본 거류민 보호를 내세워 군대를 파견하려 하였고, 청은 속방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신속히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청군은 대원군을 임오군란의 책임자라는 명목으로 중국으로 납치해갔으며 이에 반발한 구식군인들과 일부 시민들의 근거지인 왕십리, 이태원 일대는 청군에 의해 초토화 되었다. 임오군란의 와중에 충주지역으로 황급히 피신했던 민비가 환궁함에 따라 민씨세력이 재집권하였으며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청의 내정간섭은 심화될 예정이다. 1882년 8월 정부는 임오군란으로 발생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 경비병의 주둔을 허용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손해배상금 50만원을 지불해야 하며 이미 개항한 부산, 원산, 인천 각 항의 상업활동 범위를 확장하는 등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일본은 더 많은 이권을 챙기게 되었다. 이는 임오군란이 수습되고 조선에서 청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청을 견제하면서 다시 조선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일본의 계획인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 무력 정변 일으켜 신정부 수립, 근대적 국정개혁 시도-3일천하

갑신정병의 주혁, 개화당의 모습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 관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민영익,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민영목 등 민씨세력 요인들을 살해하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이들은 외국의 각 공사에게 신정부의 수립을 통보하는 한편, 14개항의 혁신적인 개혁요강을 발표하였다. 이는 문벌타파, 사민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기구 개편등의 내용으로 개화당 요인들은 근대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개혁을 단행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정변은 뒤늦게 사태의 진상을 눈치챈 민씨세력의 요청으로 청군이 출동하고,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군이 청군의 공격을 받고 퇴각해버림에 따라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14개조 개혁 요강/
0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0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0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0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0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0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07. 규장각을 폐지한다.
0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0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내의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갑신정변 뒷이야기/
1884년 음력 11월 갑신정변의 사후수습책으로 우리 정부와 일본 사이에 한성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에 대한 조선의 공식사과, 일본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 11만원 지급, 일본인 살해범 조사, 처벌, 공사관 신축지 비용부담 등이 주요 내용이다. 1885년 음력 3월 청과 일본은 청.일 양국군의 철수와 , 장차 조선에 파병할 경우에 상대국에 미리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군과 민간인이 청군에게 희생된 것에 대해 일본이 강력하게 청군의 책임을 묻고 나온 것. 청.불 전쟁으로 여유가 없었던 청은 일본에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서 청과 대등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1차 봉기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전쟁의 첫 횃불이 타올랐다. 이날 고부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의 타도를 외치며 봉기를 일으켜 관아를 점령하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궁민에게 나눠주는 한편, 원한의 표적이었던 만석보를 파괴해 버렸다. 전봉준을 위시하여 이들은 계속하여 관군을 격파하며 북상하여 마침내 1894년 4월 27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1894년 5월 7일, 정부측과 호남 일원에 집강소를 설치하며 폐정개혁을 실시할 것을 약속받고 일단 철수하게 되는데 폐정개혁안은 반제. 반봉건을 내건 혁명적 요구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폐정개혁 12개조**
01. 동학교도와 정부는 원한을 씻고 모든 행정에 협력한다.
0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03. 횡포한 부호는 엄징한다.
0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05. 노비문서는 불태워 버린다.
06.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는 없앤다.
0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08. 무명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09. 관리채용에 지연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케 한다.
2차 봉기
전주 화약이 맺어졌으나, 정부는 동학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받아들여 실천할 의지가 없었다. 또, 정부는 동학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청이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삼아 군대를 보내어 마침내 청. 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2차 봉기는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이 내정 간섭을 강화하자, 이에 대항하여 대규모의 동학 농민군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농민군은 반외세의 기치하에 일본군과 전면전을 치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농민군 패배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배다.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후퇴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1년여에 걸친 농민전쟁은 엄청난 희생 속에 좌절되었으며 앞으로 일제의 노골적 간섭과 정부의 일방적 근대화 작업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각종 개혁안을 쏟아내고 있는 군국기무처의
      회의 모습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들어선 개화파정부가 국정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것으로 봉건사회의 폐단을 철폐하고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제도적 기초를 마련하는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흥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김홍집 내각이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시행하고 있는 이번 개혁은 무려 210여건의 근대제도를 한꺼번에 수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이전까지 구분하지 않았던 정부와 왕실 업무를 각각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왕실과 국가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하는 등 정부기구를 정비했다. 그리고 은본위의 화폐제도를 실시하고 문벌과 신분을 폐지했으며, 과거제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천명했다. 그 밖에도 노비의 폐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의 폐지, 조혼의 금지 등 여러 사회 개혁이 단행되고 있다.
일본폭도 "민비시해"…천인공노할 만행
명성황후 시해 장소인 옥호루
명성황후
1895년 8월 20일, 우리 왕비가 침전에서 일본 폭도에게 살해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최근 명성황후는 박영효 등의 친일파를 추방하고 이범진, 이완용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는 등 반일정권을 수립하였으며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였다. 또한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하였던 신제도들을 잇달아 폐지하는 등의 움직임도 있었다. 삼국간섭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팽창이 저지되고 그 영향으로 조선도 친러 성향으로 급속히 기울어가자 초조해진 일본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일본인 자객들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 등 친러 세력을 죽인 다음,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는 만행을 저질렀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는 고종, 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현장을 하나하나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관여 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미우라를 해임, 코무라를 공사로 임명하고 미우라 등 48명을 형식적으로 감옥에 구치하였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곧 전원 석방시켰다.
회현방 소공동의 원구단
고종황제
1897년 10월 12일 회현방 소공동에 마련된 원구단에서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했다. 대한제국 선포는 5백년 동안 이어져온 조선왕조의 국호를 바꾼 사건으로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이제 우리도 적어도 명칭상으로는 대일본제국이나 대영제국과 동렬에 서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고종은 '옛것을 기본으로 하되 새것을 참조한다' 라는 표어를 내세웠다. 구왕조체제의 골격은 유지하면서 새로운 서구문물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체제를 공고히 하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