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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정부, 개화정책 적극 추진
2.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수호조약 체결
3. 1882년 8월, 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4. 1889년 10월, 함경도에 방곡령

5. 1894년 6월 21일, 일본군 경복궁 점령

6.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7. 1896년 2월, 자원.이권…열강에 속속 넘어가
8. 1898년 독립협회의 정치운동 본격화
9. 1899년 8월 17일, 대한국 국제 반포
 
통리기무아문 설치, 신사유람단 파견
개항 이후 정부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영선사와 신사유람단을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통리기무아문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정부기구로서 1880년 12월에 설치되었다. 기존의 의정부 6조 중심의 정부기구와 별도로 설치되었으며, 산하에 12개 부서를 두어 사무를 관장하도록 하고 있다.
영선사는 중국의 무기 제조법을 배우기 위한 유학생이다. 정부가 군비증강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신사유람단은 일본의 문물제도를 시찰하기 위한 사절단이다. 이들은 앞으로 정부의 개화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된다.
1881년(국왕 18) 시찰단으로서 일본에 도착한 박정양 일행
영국, 독일과도 잇달아 국교 수립
1882년 5월 22일 정부는 제물포에서 미국과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처음으로 체결된 통상조약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서양 각국과 활발히 국교를 확대하게 됐다. 이 조약체결에는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팽창을 우려한 중국의 실력자 이홍장(李鴻章)의 주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영사의 교환, 해난자 보호, 치외법권, 관세, 미곡 및 홍삼수출 금지, 문화교류등이 주 내용이며 최혜국 조항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은 곧바로 영국, 독일과의 수교로 이어져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다원외교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미니상식/ 최혜국 조항이란?
말 그대로 상대국을 가장 가까운 나라로 대접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는 양국간의 조약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라도 제3국과의 조약에서 보다 유리한 내용이 합의되면 이것이 자동적으로 양국간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청, 경제침투 본격화
1882년 8월 우리 정부는 청나라와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일본의 세력이 조선에서 점차 늘어나고 북으로부터의 러시아의 남하 세력이 증대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청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축소되는 데 대한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즉,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을 정치적으로 예속시키고,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도 조선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조선책략(朝蘚策略)에 나타난 친 중국론(親中國論)에 따라 조선을 부강하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 중국 상인들로 하여금 국내 개항장에서 상업 활동을 하게 하여 일본 상인들의 농간을 막을 수 있다는 논거에 의거, 청과 조선의 양측에서 통상 교섭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그 내용의 핵심은 조선이 청의 종속국임을 확인하는 것, 청 상인의 특혜 규정, 청의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 상무위원을 파견하며, 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것, 종래 국경 무역의 개방화…등이다. 청 정부의 보호 밑에 청의 상인들이 조선 각지에서 상업 활동을 하게 됨에 따라 일본과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1889년 10월,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함경도 지역에 대해 방곡령(대일 곡물수출금지령)을 선포하자, 이에 대해 일본측이 반발하고 나서 파문이 일었다.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 과정에 있는 일본은 농촌의 피폐에 따른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곡물을 대량 수입해 감으로써, 조선 내에 곡물 가격의 폭등 현상을 일으켜 도시 빈민층과 빈농층의 생계에 위협을 주고 있다. 조병식은 최근 7~8년간 흉작이 계속되어 함경도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방곡령을 내려 일본상인들에게 곡식을 팔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러나 곡물 수입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측은 사소한 규정을 트집잡으며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고 있어 농민들의 생활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국왕 일가 연금, 군국기무처 설치...
1894년 6월 21일 새벽,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대 1개 연대가 일본공사 오오토리(大鳥규)의 지휘 아래 경복궁에 침입, 국왕과 왕비를 감금하고 서울 4대문을 장악하는 상식 이하의 사태가 발생했다. 갑작스런 외국 군대의 침입에 놀란 우리 궁궐 호위병과 병사들은 즉각 대응태세에 들어가 양측이 대포와 총을 난사하는 시가전이 벌어졌으나 국왕을 인질로 잡은 일본군의 협박에 아군들은 분을 삼키며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무력으로 궁궐을 점령한 일본군이 요구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독립' 과 '개화정책 시행' 이다. '독립' 이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으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일본의 속샘인 것으로 보인다. '개화정책 시행' 은 친청적인 기존 세력을 갈아치우기 위한 구실인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일본은 군국기무처라는 모든 국정을 최종 결정하는 초정부적인 기관을 만들게 하고 기존 집권세력을 철저히 배재한 사람들로 위원단을 구성했다.

국왕-러 공사관으로 피신, 친일내각 붕괴
일본이 대포까지 동원해 러시아 공사관 앞에서 국왕의 환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국왕이 비밀리에 궁궐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왕은 정동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마자 김홍집 등 친일대신들을 모두 체포, 처형하라는 칙령을 발표하는 한편 이완용·박정양·이윤용 등을 주축으로 하는 친러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또한 단발령에 대해서도 민심을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언급을 피하며 의병항쟁에 대해서도 출동한 병력을 조속히 소환하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김홍집은 체포되어 종로에서 처형당했으며 다른 친일 대신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아관파천은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 정치인들과 웨베르 러시아공사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거세하기 위해 꾸민 것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지난 을미사변에서 왕후가 시해당한 것에 충격을 받아 이후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지내온 국왕의 결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국왕이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벌어지고 이는 이러한 행태들은 의병들 사이에서조차 비웃음을 사는 등 우리나라의 일그러진 정치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아관파천 뒷이야기
1897년 2월 20일 거국적인 환궁 여론과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시달리던 국왕이 환궁을 결심하고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다. 이번 환궁으로 1년여만에 나라의 체통이 제대로 서게 되었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환궁 후 국왕은 의정부 제도를 부활시키는 등 국왕권 을 강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국가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왕의 강력한 정국주도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우리 나라의 각종 이권이 속속 열강의 손에 넘어가고 있다. 1896년 3월에는 미국에 경인철도 부설권이, 4월 러시아에 경원·경성 금광채굴권이, 7월에는 경의철도 부설권이, 이어서 같은해 7월과 8월에 걸쳐 러시아에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과 무산 압록강 유역·울릉도 산림 벌채권이 넘어갔으며, 이듬해 3월 독일에 금성·당현 금광채굴권이 넘어갔다.
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러시아가 이권획득에 열을 올리자 그 뒤를 이어 미국·독일·프랑스·일본 등 나머지 열강도 이권 획득 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 그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하여 열강이 서로 견제하여 균형상태를 이루는 것이 우리 국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열강의 이권침탈로 인해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헌의 6조' 건의-러시아 배격운동에서 정부비판으로
독립문 건립사업을 목표로 결성되었던 독립협회가 그동안 토론회 등을 통해 민중계몽에 주력했던 활동방향을 바꿔 대중집회를 통한 정부비판운동을 전개하고 있어, 정부와 독립협회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간 독립협회가 벌여온 운동은 러시아 반대운동, 대신들의 비리와 정부정책 공격, 중추원 개편을 통한 독립협회의 정치참여 요구, 연좌법 폐지 주장 등이 있다. 1898년 10월 29일에는 종로에서 정부 대신들을 참석시킨 가운데, 관민공동회를 열어 헌의6조를 채택함으로써 정부와 독립협회간의 줄다리기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10월 31일 정부가 돌연 독립협회 지도자 17인을 구속하고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습격하는 강경책을 취해 결국 독립협회의 해산으로 이어졌다. 이는 박영효 등 그간 정권장악의 의도를 드러내던 독립협회내 과격파에 대한 국왕의 의심이 폭발한 결과인 것으로 보여진다.
독립협회 도전 진압-강력한 군주권 중심의 통치체제 구축
1899년 8월 17일 대한제국 정부는 대한국 국제를 제정, 공포하여 황제의 전제군주권을 대내외에 선포하며 강력한 군주권 중심의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정권에 도전하는 독립협회의 일부 세력을 진압한 정부는 전문 9개조의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대한제국이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하고, 황제에게 육·해군의 통솔권과 계엄권, 볍률의 제정. 공포권, 행정 각부 관제의 제정 및 문무관 임명권, 외국과의 선전·강화 및 조약체결권 등 입법·행정·사법에 관한 제반 통치권을 부여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이러한 일련의 왕권 강화정책은 이용익·윤용선·김병시·심상훈·이재순 등 대체로 황실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