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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1년, '조선책략' 파문과 척사운동 전개
2. 1882년, 나라의 얼굴-국기제정
3. 1895년, 유길준 서유견문 펴내
4. 1895년 9월 9일, 태양력 사용 결정
5.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 선포되다
6. 1896년 1월, 반일 의병투쟁
7.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창간
8.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 창립-독립문 건설
 
영남 만인소 등 잇단 척사상소에 개화정책 주춤
1881년 정부의 본격적인 개화정책 추진 속에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들여와 그 내용이 알려지자 유생들의 대대적인 척사상소가 줄을 있는 등 파란이 일고 있다. 조선책략은 일본주재 청국공사관 참찬관인 황준헌이 쓴 것으로, 조선이 부강하기 위해서는 개화를 서둘러야 하며,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중국. 일본. 미국과 결합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영남지역의 유생 만여 명이 정부의 정책을 규탄하고 척사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전국의 척사여론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5월에는 경기도와 충청도, 그 뒤로는 강원도의 유림들에 의하여 이 같은 상소의 행렬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서구 열강을 왜구와 같은 오랑캐로 보고 서양 문물을 배척하였으며 통상을 극력 반대하였다. 정부에서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으나 결국 이를 주도한 이만손 등의 유생들을 완도, 신지도(薪智島) 등지로 유배하였다. 이 사건으로 개화파와 보수파의 갈등이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최초의 태극기
1882년 나라의 얼굴, 태극기가 만들어졌다. 흰 사각천 한가운데에 우리의 전통문양인 홍색과 청색이 어우러진 태극을 그려넣고, 그 주위를 8괘로 둘러싼 것이다. 이번 태극기 제정은 지난 8월, 6월에 있었던 임오군란의 사후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특병전권대사 박영효가 일본 고베항에 입항하면서 선박에 이 태극기를 내걸어 첫선을 보였다.

서유견문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이 최초의 서양 유학생으로서 서양 문물과의 만남과 충격, 설렘을 기록한 '서유견문' 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지식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 저술이자, 최초의 서양문물 소개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부터 18편까지는 세계 지리와 서양문물의 소개로 일관되어 있고 제 19편과 20편은 미국과 유럽 대도시의 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사정' 을 바탕으로 하고 여러 책을 참고하여 정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개화 교본에 가까운 책으로 개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담은 서양 견문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주장하는 개화의 방식은 서양의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라 앞선 서양의 신문화를 받아들이되 우리 설정에 맞게 수용하여야 하며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만 참다운 개화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서 민족사상과 개화정신을 함께 엿볼 수 있다.
근대화 추진 일환
1895년 9월 9일 정부는 올 11월 17일부터 태양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올해 음력 11월 17일이 양력 1월 1일이 된다. 그리고 이날부터 연호를 태양력 채택을 기념하여 건양이라고 하기로 했으며 양력 1월 1일 즉 건양 원년 1월 1일부터 모든 공문서에 음력 대신 태양력을 쓰게 된다. 태양력은 현재 서양 여러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고 활발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현 정부도 태양력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친일대신 종용…고종 끝내 상투 잘라

1895년 11월 15일 "짐이 솔선수범하여 머리칼을 자르니 백성들은 짐의 뜻을 따라 만국의 대열에 동참토록 하라" 국왕이 상투를 잘랐다. 김홍집, 유길준 등 대신들 역시 상투를 풀고 머리칼을 잘랐다. 이번 단발조칙은 일본공사의 강압 및 친일대신들의 협박으로 마지못해 취해진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발령을 강력하게 비난하며 사임하고 낙향한 학부대신 이도재를 비롯, 전국의 단발령 반대와 반일여론이 극심하여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국모의 원수를 갚고 신체를 보존하자"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모습
1896년 1월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전국에서 단발령에 반대하는 대규모 의병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춘천의 이소응, 제천의 유인석 등 덕망있는 유학자가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단발한 관찰사와 군수 살해, 일본인 거류지 습격, 일본인과 일본수비병 살해, 일본 군용 전선과 전주 절단, 파괴 등 반일행동이 격화되고 있다. 의병들은 "왕후시해에 대해 복수하고 형체를 보존한다" 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깃발을 내세우고 연일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한편, 정부는 이러한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친위대를 파견, 진압에 나섰으며 여기에 일본수비대도 가담하고 있다. 이번 의병은 국모시해로 반일감정이 격화돼 있던 민심이 단발령으로 인해 폭발한 것이라고 분석되고 있다.
 
발행인 서재필
1896년 4월 7일 독립협회가 창립됐다. 최근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씨가 인민의 눈과 귀를 개명시킬 것을 창간목표로 내걸고 순한글로 제작하고 있어 더욱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독립신문」은「한성순보」이래 조선에서 두번째로 발행되는 신문인데 4면 중 한면은 영어판을 만들어 외국인에게도 조선 사정을 알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로 넣어주세요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립됐다. 창립총회에서는 회장에 안경수가, 위원장에는 이완용이 선출되었고 서재필은 미국 국적을 갖고 잇는 까닭에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총회는 우선 주요사업으로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설에 적극 나서기로 하고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에 대한 계몽활동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독립협회가 주관한 독립문 건설은 1897년 11월 20일 완공되었으며 범국민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독립문은 옛 영은문 터에 건설되었는데 영은문은 옛날 조선정부가 청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였던 문이어서 더욱 의미가 새롭다. 각계 각층의 정성과 헌금이 모아져 독립문이 세워진만큼 나라의 독립이 반석 위에 올라서기를 바라는 것이 국민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영은문   완공된 독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