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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일전쟁
2.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3. 스타탄생! 안창호
4. 집중탐구: 구세학당
5. 이 사람 점진학교 교장 안창호
6. 그것이 알고싶다.

1. 청일전쟁
중국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 지배권을 둘러싸고 한반도에서 군사충돌을 일으켜, 일본이 크게 승리하였다. 1894년 전주에서 발생한 동학혁명을 빌미로 군대를 보낸 청·일 양국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던 중, 7월 25일 풍도(豊島) 앞바다의 해전을 시작으로 성환(成歡)·평양·황해 등의 육지와 바다에서 전투를 하였다.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중국을 침략하여 봉천(奉天) 남부를 제압하였다. 또한 일본은 위해위(威海衛) 군항에서 북양(北洋)함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대만(臺灣) 점령을 위하여 평호도(澎湖島) 작전을 벌였다. 연전연패한 청은 이듬해인 1895년 일본 하관(下關)에서 조약을 맺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대만 ·평호도 등을 할양하였다.
일본이 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함으로써 이후 이 지역의 국제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주목되고 있다.
인천항을 행군하는 일본군의 모습(1904년)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일본군

2.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러시아의 침략정책에 맞서

광무1년(1897), 러시아는 절영도 석탄고기지 조차, 재정고문 및 군사교관 파견, 한러은행의 설립 등을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해왔다. 이에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서울 종로에서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여 규탄하는 군중집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나서서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결의하는 연설회가 열렸다. 그리고 3월 12일에는 독립협회와 관계없는 서울 남촌(南村)에 거주하는 평민 수만 명이 운집하여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 만민공동회에서 자발적으로 등단한 연사들은 이 기회에 러시아뿐만 아니라 모든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견고히 하자고 연설하였다.

10월에는 종로에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정부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여 개혁정책을 실현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의회설립 하루 전에 독립협회 간부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키고, 다시 조병식(趙秉式)을 내각수반으로 한 친러수구파 정부를 조직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서울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조직하고 사건의 해명을 요구하였다. 만민공동회는 체포된 지도자 석방을 요구하면서 만 6일간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 시위하였다. 광무황제는 더 이상 만민공동회를 탄압할 수 없음을 알고,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울 시민들은 해산하지 않고 만민공동회를 종로로 옮겨 철야 시위를 계속하면서 독립협회 복설(復設)·모략배의 재판·헌의육조 실시를 요구하였다. 광무황제가 그들의 요구조건을 듣지않자 인화문(仁化門) 앞으로 만민공동회를 옮겨 압력을 가중시켰다. 만민공동회 개최 13일째에는 국내의 대표적 신진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의 13개 부서의 간부직을 담당하면서 만민공동회는 더욱 크게 강화되었다.

결국 광무황제와 수구파들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해서 황국협회(皇國協會) 아래에 조직되어 있는 지방 보부상들을 서울로 불러올려 몽둥이로 무장을 하고 군사대오를 편성하여 만민공동회를 기습하였다. 여기에서 만민공동회는 패퇴하였지만, 이튿날 시민들은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다시 개최하고 수구파와 황국협회를 격렬히 규탄하였다. 이에 국왕은 독립협회의 복설을 허락하고 50명의 중추원의원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개혁정치를 기피하던 수구세력은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집회를 해산시키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불법화시키고 해체령을 포고하였으며, 430여 명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일거에 체포, 구금하였다.

(출처: 한국사 기초사전, http://www.koreanhistory.or.kr)

독립관에서 행하는 강연을 듣기 위해 모여든 군중

3. 스타탄생! 안창호

평양 쾌재정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독립협회 관서지부는 1898년 7월 25일(음력) 평양 쾌재정(快哉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는 광무황제 탄신일을 기념하고 자주독립과 부정부패의 척결을 만민에 호소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약관 20세의 청년 안창호가 연사로 나와 탐관오리의 부패상태를 통쾌하게 고발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도산은 수만의 군중이 모여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말로 휘어잡은 뒤, 이들 군중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그는 먼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쾌재정 쾌재정하기에 무엇이 쾌인가 하였더니 오늘 이 자리야 말로 쾌재를 부를 자리올시다. 오늘은 황제폐하의 탄신일인데,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 축하를 올리는 것은 전에 없던 처음보는 일이니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군민동락(君民同樂)의 날이라 어찌 쾌재가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 이하 높은 관원들이 이 축하식에 자리를 같이 하였으니 관민동락(官民同樂)이라 또한 쾌재가 아닐 수가 없고, 남녀 노소 구별 없이 한데 모였으니 만민동락(萬民同樂)이라 더욱 쾌재라고 하리니, 이것이 쾌재정의 3쾌라 하는 것입니다."

독립협회 평양지회 회원으로 활동할 때의 모습
(가운데가 도산)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자 도산은 "세상을 바로 다스리겠다고 새 사또가 온다는 것은 말뿐"이라고 지적하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크게 비판하였다. 이에 자리에 참석한 군중들은 '옳소, 옳소'하고 소리치며 박수를 쳤으며, 같이 있던 관리들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고 한다. 소설가 김동인은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 수천의 군중이 옷깃을 바로 잡고 고요히 연설을 듣고 있는 것이 퍽이나 엄숙하게 보였다. 그러다가 한 귀퉁이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그의 열변에 감격한 것이리라. 그 울음소리는 순식간에 다른 한 귀퉁이로 옮아갔고 또 다른 한 귀퉁이로 옮아 갔다. 그래서 조금 뒤에 그 넓은 장내는 흐느낌으로 가득 찼고, 곳곳에서 군중들은 팔소매로 눈물을 씻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들은 머리에 꽂았던 비녀와 손가락에서 가락지를 빼어서 바쳤고, 남자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내어 놓았다. 아마 이제부터 잘 살자면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연사의 말에 학교 기부의 일조(一助)가 되라고 그 돈을 내어 놓는 것 같았다."
또한 지나가다 이 자리에 잠시 쉬면서 연설을 들었던 유기장사 이승훈은 그의 연설에 감동하여 학교를 세울 결심을 하였고, 이후 오산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출처: 안성결(1996).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도산기념사업회, 서울: 한국문화사.
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이광수(1998). 『도산 안창호』, 서울:흥사단출판부)

4. 집중탐구: 구세학당
   
구세학당은 한국 기독교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 1859-1916) 목사가 세웠다. 구세학당은 처음에는 고아원으로 출발하였으며, 그의 후임자인 밀러(Frederick Scheible Miller; 한국명 민노아, 1866-1937) 목사가 관리하면서 구세학당·예수교학당· 밀러학당 혹은 민노아학당으로 불리게 된다.
언더우드는 영국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가 13세 되던 해에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러나 강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도 자녀교육에 힘썼으며, 언더우드는 뉴욕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언더우드는 다시 신학교에 입학하여 네 살때부터 갖고 있던 선교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한다.
  선교사 밀러
한국선교를 자청하였으나 그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일본과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그는 1894년 마침내 한국선교의 임무를 허락받게 된다. 그는 한국에서 먼저 활동하던 알렌이 세운 병원(제중원)에서 약제사로 한국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종교활동에 소극적인 알렌을 비판하고, 서울의 정동 부근에 있는 자신의 집에 병원을 세워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고아들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고 있던 언더우드는 이후 자신의 집에서 고아원을 운영하였으며 이것을 이후 학교로 발전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학생의 수는 날로 증가하였다. 한국최초의 장로교 교회인 새문안 교회의 차재명 목사에 따르면 학생의 의식(衣食)과 학비는 선교사가 부담하였는데 학생이 백여명이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 후반에 이르러 기독교대학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고 1888년 9월 8일 미국공사 딘스모어(Hugh A. Dinsmore)를 통해 조선 정부의 외아문 독판 서리 이중칠 앞으로 대학설립 허가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10일 뒤인 9월 17일 재차 공문이 발송된 후 4개월 뒤인 1889년 1월 25일 회답에 의해 설립이 보류되었다.
고아원은 밀러 목사가 맡은 후 학교로서의 체제와 기구를 갖추고 이름을 예수교학당 혹은 구세학당(救世學堂)이라고 고쳤다. 교육목표는 조선인들에게 기독교적 진리를 가르치는 전도사와 교사의 양성에 두고 있었고 학생들이 장차 사회에 나아가 그들이 받은 교육 이념을 적절히 활용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도 병행하였다. 밀러 목사에 의해 경영된 구세학당은 한문과 한글, 그리고 제식훈련 등을 교육하였는데 김규식은 물론 도산 안창호 등을 배출하였다. 이후 구세학당은 1905년 봄에 '새로운 것을 깨우친다'는 의미의 경신(儆新)학교로 이름을 고쳤으며, 또한 오늘날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출처: 박찬희(2002). 『언더우드를 통해 본 초기 한국교회』. (http://lord.kehc.org/chmain.htm))


도산이 다닌 밀러학당 학생들과 교사들

5. 이 사람 점진학교 교장 안창호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문하되 낙심말고 하겠다 하네 우리 직무를"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한국 최초의 사립학교인 점진학교의 학생들이 힘차게 교가를 부르고 있다. 이 학교의 교장은 21세 밖에 안된 안창호 선생이다. 선생은 이미 평양의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유명한 연설을 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분이기도 하다. 안창호 교장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는 청일전쟁 이후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을 둘러싼 국제사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독립협회 활동도 있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진 것은 다른 나라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우리 스스로가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다른 나라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지금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힘의 첫 번째가 지식에 있으며, 이것은 교육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점진학교라는 이름은 점진(漸進)이란 말 그대로, "우리 모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자"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 나라를 건설하는데 당장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힘을 얻는 것은 금방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바탕부터 차근차근 쌓아감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식이나 도덕품성은 꾸준한 노력과 치밀한 계획 속에서 비로소 제대로 갖출 수 있습니다.
우리 학교는 황무지같은 조선을 튼튼한 나라로 바로 세우기 위해 훌륭한 일꾼을 길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학교에서는 덕(德)·체(體)·지(知)를 기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신입생에게는 맨 먼저 인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들이 동네어른들께 항상 공손하게 인사를 해서 칭찬이 자자합니다. 동시에 개척정신을 실천하여 하천의 제방을 쌓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농토를 확장해서 경제활동에도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애국애족 정신은 매우 뜨거웠고,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점진학교는 우리나라 교육계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미 점진학교를 따라 많은 사립학교들이 세워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에서는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춘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내고 있다.

(출처: 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안성결(1998).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도산기념사업회 서울:한국문화사.)

도산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직후인 1899년에 고향 강서군에 점진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강서군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학교이며 남녀공학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6. 그것이 알고싶다.
   

도산이 기독교 신자가 된 이유는?

도산 안창호는 자신을 1894년에 기독교 장로회 신자가 되었다고 밝혔다. 독립운동을 위해 세계를 돌아다닐 때에도 반드시 성경책을 챙겨 다녔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한반도에서 기독교는 충분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도산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서당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런 배경은 도산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것을 도저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 도대체 도산이 기독교에 입문한 계기는 무엇일까?

사실, 그는 애초에 기독교 신자가 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시대환경은 도산을 기독교로 안내했고, 또 그 과정에서 그는 기독교의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으로 유학을 갈 당시 대한제국 외부에서 발행한 집조(執照: 오늘날의 여권)


1894년은 평양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난 시기이다. 이 때 그는 숙부와 함께 황해도로 피난을 떠났다가, 전투가 끝나자 숙부에게서 노자를 얻어 서울로 향하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정동의 구세학당에 입학하였다. 이 때 그는 유교를 배우던 사람이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실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그러나 학당에서 송순명이라는 접장의 설득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던 것 같다. 송순명은 새문안교회(언더우드가 자신의 집에 세운 교회, 한국최초의 장로교회)의 장로로 50년 이상 시무한 인물이며, 언더우드에게서 교육을 받고 이 때 구세학당 의 교사로 있었다.
1894년 말 당시 이 학당에는 46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15명이 기숙생이었다. 물론 도산도 기숙생이었다. 구세학당에서 보통반과 특별반을 마친 도산은 조교가 되어 월 5원의 봉급도 받았다. 이 사실은 그가 매우 모범적이고 우수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면서, 나아가서는 기독교에 대한 신앙도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밀러는 선교부에 제출한 보고에서,

"… 우리의 평양 소년인 안창호는 그 자리(조교)에 임명되었고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평양에서 온 소년이 보여준 열정과 정열로 인하여 사실 그 학교는 마치 하나의 새로운 단체(institution)처럼 보였다. 안창호는 그 주위에 가장 우수한 인물들을 배치하였으며 평양 사람들이 가진 열망과 정열을 (그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하였다. …"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도산이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신앙하였던 사실은 그의 약혼과 결혼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1896년 자신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집안 어른들이 결혼상대를 정해주자 그는 서울에서 평양으로 달려가 파혼(결혼약속을 취소함)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종교문제였고, 그는 약혼녀 이혜련의 가족들을 모두 기독교에 입교시켰다. 그리고 약혼녀에게 신식공부를 할 것을 요구하여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정신여학교(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한 여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미국에 가게 된 가장 큰 동기도 바로 구세학당에서의 경험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어 조사 받은 내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질문: 피고인은 어떤 목적으로 미국에 유학하였던가?
도산: 미국에서 교육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하려는 생각과 기독교의 오의(奧義, 매우 깊은 뜻)를 연구하려고 도미(渡美)하였던 것이다.
질문: 미국을 택하여 유학한 이유는 무엇인가?
도산: 그 때 나는 기독교에 관계하였기에 아는 사람 중에 미국 선교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내게는 돈이 없어 혼자서 돈을 벌어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미국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미국을 선택하였다.
질문: 민노아와는 어떤 관계였는가?
도산: 그 사람은 내가 다니던 원두우학교(구세학당)의 교장이요 또 미국 선교사이므로 그 분이 미국에 가도록 챙겨주었다.

결국, 도산이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알게 된 기독교는 그의 이후 생활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최기영(1998), 『도산 안창호의 기독교 신앙』, 도산사상연구회, 『도산사상연구』 제5집. pp.219-244.

19세기말 인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