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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창호 학생, 미국에서 퇴학당하다
2. 하와이 불법이민 적발
3. 그것이 알고 싶다.
4. 집중탐구: 한국인의 미국이민
5. 이 사람: 공립협회 회장 안창호

1. 안창호 학생, 미국에서 퇴학당하다

끝까지 지킨 양심

1902년 9월 4일 점진학교의 안창호 교장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부터 먼저 배우자. 신문화의 씨를 조국에 뿌려주기 위해서는 구미 선진제국의 제도를 내눈으로 보고 경험도 하여 보아야겠다"며 부인 이혜련과 함께 미국에 간 것이다.
도산 교장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동경·하와이·캐나다 밴쿠버· 미국 시애틀에 간 뒤, 다시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태평양을 건너던 중 하와이를 지나면서 며칠 만에 처음 본 육지의 모습에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다 한 복판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는 육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결심에 섬 도(島)와 뫼 산(山)자를 붙여 아호를 정하였다.

돈도 없고 말도 잘 안통하는 미국에서 도산은 미국인의 집안일을 해주면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청소·요리·심부름·세탁 및 다림질, 그리고 애기보기 등의 일을 하면서, 도산은 공부를 시작하였다. 24세의 청년이 미국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도산은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미국 유학 시절의 일화를 소개한 조선일문 기사

그런데 한국인을 신기하게 여긴 어느 신문기자가 도산을 소개하면서 그의 나이가 밝혀지자 도산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미국인 교장이 나이가 많아 학생으로 둘 수 없다고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이후에 몇몇 학교를 찾아가 입학을 신청했지만, 도산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입학할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동양인이어서 몸집이 작으니 나이를 어리게 내리고 학교에 입학하라고 권유했지만, 도산은 끝까지 양심을 지키며 공부할 학교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어느 아량이 넓은 교장이 있는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다시 할 수 있었다.

(참고: 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2. 하와이 불법이민 적발

새로운 이민체계 확립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을 떠난 첫이민단 121명은 일본 신호(神戶)에 도착하여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여기서 20여명이 탈락되고 101명만이 미국상선 겔릭호(Gaelic)를 타고 하와이로 향하였다.1903년 1월 13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으나 이 중 86명만이 상륙할 수 있었다. 제 2차 이민단이 도착한 것은 3월 3일이었으며 1905년 7월까지 16行의 선편에 2,659명이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1903년 현재 미국법은 이민자들이 영어를 읽을 줄 알고 자신의 돈을 들여 자유롭게 일자리를 찾을 때에만 입국을 허가해주고 있다. 그러나 한인 노동자들의 경우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농장주들은 조선 현지에서 3년 간 노동계약을 체결한 뒤 이민국 직원에게 보여줄 돈 50달러를 용돈으로 주었으며, 3등칸 뱃삯을 미리 지불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미리 입국심사에 필요한 간단한 말을 외어서 입국심사를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이런 혐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이들에게 빌려준 돈들을 받지 않기로 하였으며 노동계약 역시 강요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후에 하와이에 이민국을 설치하여 현지 노동계약 대신 한인들이 자유의사로 미국에 들어올 수 있는 표면적인 장치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다만 미국에 스스로 올 능력이 있는 한인들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민을 위한 지원은 드러나지 않게 계속 유지하기로 하였다.
한인들의 미국 이민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903년 1월 13일 97명이 하와이에 집단으로 상륙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하와이에는 1905년 11월 을사오조약이 늑결될 당시까지 총 65회에 성인남자 634명, 성인여자 634명, 그리고 어린이 541명 등 총 7,226명이 이주한 상태이다.

(출처: Wayne, P.(1988). The Korean Frontier in America: Immigration to Hawaii, 1896-1910. University of Hawaii Press. 정대화 역(2002). 『아메리카로 가는 길: 한인 하와이 이민사, 1896-1910』, 서울: 들녁.
윤병석(1994).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서울: 지식산업사.)
사진: 윤병석의 책 p.294 대한제국 여권사진,

1905년 당시 멕시코 이민 여권 하와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인들

3. 그것이 알고 싶다.


20세기 초반 미국 가기.

오늘날 미국에 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비행기를 타면 24시간 이내에 지구의 거의 모든 지역에 갈 수 있다. 하지만 도산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1902년에는 그렇게 멀리 날아가는 비행기가 없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를 이용하였다. 도산은 9월 4일 제물포(지금의 인천)을 출발하여 10월 14일에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중간에 쉬는 시간도 있었지만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린 것이다. 그렇다면 뱃길은 어떠했을까? 한국에 서양식 병원(제중원)을 세웠던 주한 미국 공사 알렌(Horace N. Allen)은 자신의 저서 『조선 견문기』에서 당시 뱃길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1883년에 이루어진 최초의 여행에서 우리는 육지를 떠난 후 25일 동안을 바다에서 보냈다. … 부두에 정박하고 있는 그 배는 대형 선박이었으며, 다른 어느 것보다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는 것 같았다. 그 당시의 여행이란 파도에 대해 속수무책인 조건 속에서 오직 평안함을 찾기 위한 노력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번 여행을 갖게 된 행운을 자축했다. 마치 화가 몹시 치밀어 날뛰는 거대한 물뱀의 꼬리 부분에 앉아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우리는 배를 타고 있는 동안 몸이 아래 위로 흔들리고 이리저리 나동그라졌다. 배가 파도 꼭대기에 올라 앉아 평형을 이루거나 아니면 고물이 하늘로 향해 앞으로 꼬꾸라질 때면 우리의 선실 바로 밑에 붙은 스크루는 공중에서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 항해는 처음부터 끝가지 긴 악몽의 연속이었으며, 가끔씩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지만 알렌은 미국인으로 돈이 거의 없는 아시아인들과는 배에서 전혀 다른 생활을 하였다. 이것을 그는 또다른 여행기록에서 보여준다.

20세기 초반 하와이로 향하는 이민선

"1889년 우리는 캐나디안 퍼시픽 철도회사 소속의 한 부정기 화물선인 포트 아우구스타호(Port Augusta) 를 타고 운명적인 여행을 떠났다. … 갑판 밑의 3등 선실에는 5백 명의 중국인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부분은 미국에 있는 동안 너무 혹사당한 데다가 영양실조마저 겹쳐 몸이 허약했으므로 그토록 그리던 고국에 돌아가는 중도에서 죽었다. … 감옥과 같이 밀폐된 선실의 공기가 너무 갑갑하고 배가 너무 흔들려 몇몇 노약자들은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 … 배가 선회할 때면 선실 유리창 앞에 막바로 걸려있는 그 끔찍스러운 시체 보트를 볼 수가 있었다. 일기는 생각했던 대로 고약스러웠다. 강풍은 계속 몰아쳤으며 파도는 기절할 만큼 거세게 몰아쳤다. 날씨는 춥고 눅눅했으며 우리의 위치를 알아 볼 수도 없을 만큼 먹구름이 끼었다. … 배가 앞뒤와 상하로 요동하고 스크루가 허공에서 돌아가니 몇 군데의 기관이 고장이 나서 우리는 알류산열도를 따라 3일 동안을 표류했다. … 주위가 이토록 음산해지고 더 많은 중국인들이 죽어 보트는 시체들로 가득해지자, 새로이 발생된 시체를 바다 속으로 던지기로 했다. … 우리 배에는 14-16일의 항해에 필요한 준비물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항해가 25일까지 계속되자 나머지 며칠 동안 우리는 주로 적은 양의 화물 밀가루로써 빵을 만들어 연명하고 있었다. … 살아남은 중국인들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한 데 대해 해신(海神)에게 얼마나 성대하게 제사를 드렸는지 모른다. "

이렇듯, 당시에만 하더라도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모험이었으며,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였다. 한국의 경우, 1903년 하와이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미국 이민역사를 시작한다. 이렇게 위험한 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의 암울한 상황을 되돌아보며 오늘날 한국을 다시 생각해 보자..

(참고: N.H. 알렌(1999). [조선견문기] 서울:집문당 (원작은 Things Korean : A Collection of sketches and anecdotes, missionary and diplomatic. 1905) )

4. 집중탐구 : 한국인의 미국이민


미주 한인 이민 역사는 1903년 102명의 한인들이 인천항을 떠나 사탕수수 노동자로서 하와이의 호놀루루에 도착한 것을 시점으로 한다. 당시 한국의 시대 상황은 조선 왕조(1392-1910)시대 말기로 양반 지주들과 부패한 관리들은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쥐어짜냈고 가뭄과 홍수로 인한 잦은 흉년은 농촌에 기근과 전염병을 만연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 러시아 등과 같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투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으로 떠오른 일본 역시 한국을 식량과 원자재의 공급처로 바라보고 깊이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 (1904∼1905)의 발발은 한국 농촌의 임야와 가옥들을 파괴하고 전소시켜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시베리아나 만주, 또는 서울, 인천, 원산 등과 같은 대도시로 일거리를 찾아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유민들은 조선 사회의 전통적인 사회 규범이나 조상 숭배와 같은 의무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단절되면서 기독교와 같은 새로운 사상을 빠르게 수용하게 되었고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을 하면 1개월에 미화 16달러의 임금을 보장한다는 선전 문구는 당시 가난에 시달리던 한국 노동자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하와이 이민은 한국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고 출국한 이민의 효시로 1903년부터 1905년까지 7,200여명(남자 6,048명, 여자 637명, 아이들 541명)의 한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건너왔다.
그러나 하와이에서의 생활은 모집 선전 문구처럼 달콤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하루 10시간씩 뙤약볕과 채찍질 아래서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일만하는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이름조차 없이 이민국에 등록된 번호로 불리우는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으며, 모진 혹사를 당하면서도 반항할 수도 없는 악조건 속에 받은 하루 품삯은 남자가 67센트, 여자와 아이들은 50센트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협회는 여러 나라로부터 모집해 온 이들 노동자들을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도록 교묘하게 조정하여 노동 조합을 만들지 못하게 '노동자 분리 정책'을 이용, 철저히 노동자들을 관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기대와는 달리 심한 노동과 언어와 풍습의 차이 그리고 고국에 대한 향수에 시달려야 했던 한인 노동자들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 잃은 망국의 설움까지 겹치자 일부 노동자들은 술을 마시고 폭력과 도박에 빠져들었다.
이에 농장주들은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한인 노동자들 가운데 노총각들을 대상으로 결혼을 주선하였는데 그것이 곧 '사진 결혼'이다. 이는 하와이에 있는 총각들이 사진을 보고 여자를 고르면 선택된 여자가 하와이로 건너와 결혼하는 방식으로써 미국 정부는 사진 결혼으로 미국에 들어오는 한인 처녀들에게 영주권을 주었다. 그리하여 1910년 12월 2일, 최사라(당시 23세)가 한국인 사진 신부 제1호로 당시 하와이 국민회 총회장이던 노총각 이내수(당시 38세)의 신부가 되기 위해 호놀롤루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사진 결혼은 1924년 5월 15일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계속되어 영남 출신의 신부 951명, 북한 출신의 신부 105명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출처: 코리아나뉴스 http://www.koreananews.com/1xx/14x/141/141cov.htm)

 

하와이 에바 농장 숙소 앞의
한국 부인들과 아이들
하와이 농장에서 한인들이 일하는 모습

5. 이 사람: 공립협회 회장 안창호


1905년 4월 5일 미국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한데 모여 민족의 단결을 외쳤다. 최초의 미주 한인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가 결성된 것이다. 이 단체는 11월부터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여, 회원들에게 한국과 관련한 각종 소식과 미주한인사회의 계몽운동에 힘쓰고 있다.
이 단체는 도산 안창호가 직접 발기하여 조직한 단체로, 선생은 미국 지역의 한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이며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안창호 회장은 어째서 <공립협회>를 조직하였을까?
24세에 미국에 교육학 공부를 위해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도산 안창호는 길가에서 한국 사람 두 사람이 상투를 마구 잡고 싸우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런데 미국인들이 이 장면을 미국인들이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산은 서둘러 그 싸움을 말린 뒤, 싸운 이유를 들었는데, 서로 장사구역을 침범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매우 가난하였다. 당시 미국에 사는 많은 한국인들은 먹을 것을 찾아 한국을 떠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여유가 없었다. 그 결과, 한국인들이 사는 지역은 매우 불결하였으며 한국인이 사는 집은 얼른 보아도 표시가 날 정도였다. 유리창이 더럽고, 정원이 손질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불쾌한 냄새들이 너무 심해 미국인들이 근처에 가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미국인들 사이에 한국과 한국인은 매우 미개한 국가, 미개한 민족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도산은 다른 나라에서조차 이렇게 괄시를 받는 이상 조국의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외국의 지지가 필요한데, 이런 상황이라면 외국은 일본이 주장하는 한반도 개화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사를 마친 도산은 이후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 나와있는 한국인들도 계몽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선생은 이후 유학을 포기하고 동포들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들의 단결을 강조하며, 직접 돌아다니면서 한국인들의 집을 청소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은 도와주고,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도산은 동포들로부터 커다란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있었으며, 덩달아 한인사회도 크게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도산은 공립협회를 창설하여 체계적으로 한인들의 계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안창호 회장이 미국에서 계몽운동을 시작한지 1년 쯤이 지나자 미국인들의 인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러던 중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부자가 어느 한국인에게 물었다.

"당신의 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왔소? 당신네 한국인들이 일변하였소. 위대한 지도자 없이는 이리 될 수 없소."

그래서 한국인은 그 미국인 부자에게 안창호 회장을 소개해 주었다. 미국인 부자는 한국인을 갑자기 변화시킨 장본인이 새파랗게 젊은이인 것을 보고 놀랐다. 또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를 위해 헌신하는 도산의 헌신에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 부자는 자신의 가옥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매년 1개월치의 집값을 면제해 주기로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도산이 계몽활동을 더 잘 펼칠 수 있도록 회관을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이 사건은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문화국민으로서 커다란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으며, 이후 더욱 강력한 한국인 조직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참고: 이광수(1998). [도산 안창호] (제3판). 서울: 흥사단 출판부)

하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
1905년 11월 20일에 창간되어 1907년 4월 6일자부터 활자본으로 발간되었다.
공립협회 회장으로 활동할 때의
도산(왼쪽)과 정원명(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