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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산 선생 귀국
2. 비밀결사 신민회, 일제에 노출
3. 암살인가 척살인가?
4. 도산 선생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다.
5. 블라디보스톡의 한인들
6. 한 장의 편지

1. 도산 선생 귀국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계몽운동 시작

미국에 설립된 국민회가 안창호, 이강, 임준기 등 세 명의 대표단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1904년에 발생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대한제국의 장래가 매우 위태로와지자, 국내에서부터 나라 살리기 운동을 벌일 필요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도산 선생이 주동이 되어 1907년 신민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나라의 실력을 배양하여 자주독립의 기틀을 세우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신민회는 네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①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넣어 준다.
②동지들을 발견하여 서로 단합하여 국민운동의 활동을 착실하게 한다.
③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들을 교육한다
④여러 가지 산업 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을 부유하게 이끈다.
신민회는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교육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지도자를 양성하며, 서점인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국민들을 계몽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산업을 일으키고자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중시한 것이 학교설립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해 도산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신민회 동지인 이승훈과 함께 정주에는 오산학교를 세웠다.

 

  강제병합을 준비하며 통감으로 부임하는 데라우찌(寺內正毅)의 행렬:
데라우찌는 병합 후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에 임명되어 무단통치를 행하였다.

대성학교는 일반 중등학교와는 성격이 달랐다. 우선 민족운동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둘째 국민교육을 할 교육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학교 성격은 일장기 게양 거부사건으로 잘 드러난다. 1909년 2월 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융희황제가 서도(西道)를 순행할 때 일본의 한국통감부에서는 도산에게 대성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일장기를 들고 나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황제 순행에 이토 통감이 따라오는 것은 수행원으로 온 것이니, 황제를 환영하는 태극기 외에 수행원을 위해 그 국기를 내건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만약 수행원의 국기를 게양하면 황제를 위하는 대한 우리 국민의 충성심이 어찌 미안하고 불쾌하지 아니리오"하고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통감부는 일장기를 달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성학교를 폐교시키려고도 하였다.
대성학교는 이후 <105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졸업생 19명과 천 여명의 재학생을 남기고 폐교당했다. 하지만 당시의 졸업생과 학생들은 이후 민족독립운동에서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게 된다.

(참고: 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선생]
전영택 편(1967). [도산 선생], 대한 기독교 계명협회.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1999).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도산 선생의 생애])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동지들과 함께한 도산 선생

2. 비밀결사 신민회, 일제에 노출
105인 사건으로

1910년 선천에서 안명근이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척살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작하여 그동안 의심이 가는 700여명을 검거하였으며 그 중 105명을 구금하는 <105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비밀리 활동해오던 신민회 조직이 노출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신민회는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 선생의 발기로 만들어진 비밀단체이다. 일제가 만든 '보안법'과 '신문지법' 등의 악법들에 대항하여 과거 독립협회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었다. 이 조직은 각 도와 각 군에 책임자를 정하고 상하관계의 사람들끼리만 연락을 함으로써 비밀을 지킬 수 있었다. 신민회 활동은 회원의 가족조차 모르고 지낼 만큼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신민회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제는 신민회와 기타 애국단체를 해체시키기 위해서 안명근의 데라우치 척살미수 사건을 신민회에 연결지위 혐의를 조작하였던 것이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되 국민이 뽑은 대표로 운영되는 공화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실력을 양성해야 하며, 실력양성은 바로 신민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왕을 중심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과거의 입헌군주제 주장과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다. 또한 신민회는 실력양성을 위하여 교육구국운동, 계몽강연 및 서적·잡지 출판운동, 민족산업 진흥운동, 독립군 양성운동 등의 활동을 하였다.

<105인 사건>으로 공판장에 끌려가는 신민회 회원들

3. 암살인가 척살인가?

안중근 의사의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중국 하얼삔(哈爾濱) 역에서 만주분할 지배를 협의하려고 방문한 일본 추밀원장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였다. 그런데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대하여 단순한 살인인지 아니면 적에 대한 당연한 응징인지에 대하여 한국과 일본의 해석이 다르다. 즉, 일본에서는 안중근을 살인자로 보는 반면 한국에서는 의로운 사람으로 보는 등 서로 다른 시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의 차이는 이후 양국의 관계발전을 위해서라도 하나로 통일될 필요가 있다.

당시 사건이 단순한 살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안중근이란 사람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안중근의사


만일 살인자라면 그가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거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원한으로 사건을 일으켜야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청년기에 이미 선각자적인 교육자였고, 고도의 지성을 겸비한 지식인었으며, 스스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항일 의병전쟁을 감행한 의병대장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대학교 설립안'을 제출한 적도 있었다. 이는 매우 획기적인 일인데, 왜냐하면 일제 식민지 한민족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한하는 우민화 정책이 일제의 주요 식민지 정책이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국채보상운동 때에는 평안도 지부장이 되어 부인의 패물까지 헌납할 정도의 애국자였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작하였으며, 1908년에는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이런 활동의 연속선 상에 있으며, 실제로 그는 사건 당시 대한독립단에 소속하여 동료들과 함께 작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추밀원장이 되기 전에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지체제를 굳힌 일본 군국주의의 선봉에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안중근은 독립전쟁 중 적국의 지도자를 처단한 의사(意士) 즉, 의로운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제1차 공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은 3년 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을 실행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 전쟁을 하얼빈에서 전개하여 이토를 죽인 것이지, 결코 나 개인으로서 결행한 것이 아니다.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실행한 것이므로 실제로는 포로로 취급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하나의 살인 피고인으로 이곳에서 취조를 받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신용하(1995). [안중근 유고집]. 서울: 역민사)

안중근의사의 하얼빈역 의거현장 (1909년 10월 26일 오전 10시)
4. 도산 선생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다.



만주 밀산에 한국인 독립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1909년 10월 안중근 의거가 있자, 한국에서는 애국자들에 대한 검거열풍이 불었다. 이런 열풍은 도산 선생에게도 미처, 의거 다음날 일제 헌병에 의해 대성학교 교정에서 피체된 선생은 서울로 호송되어 용산 일본헌병대 유치장에 갇히었다. 각처에서 신민회의 중심인물들이 검거되었다. 일제는 안중근 의거를 신민회의 거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거와 신민회의 관계에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일제는 죄없이 잡은 사람들을 석방할 수 밖에 없었다.
1910년에 들어와 용산헌병대에 재소환되자 도산을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은 더 이상 한국에서 "혁명가"로서 독립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판단, 해외로 망명을 떠났다.
얼마 후 도산 선생을 비롯하여 김희선·신채호·이종호·이종만·유동열·김지간· 이강 등의 망명애국지사들은 청도에 모여 앞으로의 일을 모색하였다. 여기서 나온 의견이, 이종호의 재정지원을 받아 북만주 밀산 지역의 땅을 사 개간하여 자급자족을 하면서 사관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행은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었다는 소식이 블라디보스톡으로 전해지자, 이종호는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당시 이 지역에는 도산 선생를 비롯한 평안도 출신의 독립운동가들과 이종호가 속해 있는 함경도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는데, 함경도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이종호에게 굳이 밀산에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도산 선생은 크게 실망을 하였다. 평소 낙담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도산 선생도 이 때 만큼은 낙심한 모습을 가리지 않았다. 도산 선생은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미국에서 여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1년 남짓 동안, 도산은 러시아 각지를 시찰하였으며, 그 와중에 북만주 목릉에 사는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만나기도 하였다. 또한 각지의 교회와 학교에서 연설회를 개최하고 사람들의 단결과 실업의 장려를 호소하였으며, 이를 체계적으로 실시하도록 자선공제회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참고: 박환(1995). [러시아한인민족운동사] 서울: 탐구당
박현환 편(1954). [속편 도산 선생] 삼협문화사.)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3.1운동 1주년 기념행사(1920년)

5. 블라디보스톡의 한인들

 

러사이의 블라디보스톡은 한자로 해삼위(海蔘威)라 불린다. 블리디보스톡은 1860년 제정러시아가 연해주 지역을 차지한 이래 세계적인 군사항구로 명성을 얻고 있다. 하지만 한국 근대사에서 블라디보스톡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한민족이 조국광복을 도모한 항일독립운동의 국외기지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특히 1910년 전후부터 3.1운동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연해주와 서·북간도를 기반으로 한민족의 독립운동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한인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863년 13가구가 두만강을 넘어 정착하면서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이주 초기 단계에는 특히 함경도와 평안도의 농민들이 흉작과 조선관리들의 부패 때문이었다. 이후 1900년을 넘으면서 이주민 숫자는 몇 만명을 넘어섰는데, 이 시기부터는 국권쇄락에 따른 독립운동가들의 발길이 늘어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1910년 국치를 경험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역으로 크게 선호되었으며, 이 때쯤 이 지역의 한인들은 10만명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 윤병석(1994).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서울: 지식산업사.

간도에서 한인들의 생활모습 한국을 떠나는 이주민들의 모습

6. 한 장의 편지


나의 친우여
매우 고마운 당신의 편지와 선물을 받았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사례를 받을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편지와 선물을 받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당신이 매우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며, 또한 하시는 모든 일들이 잘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얼마 안되는 친절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그 정도로 사의를 표해주시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제게는 너무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며, 복된 앞날이 있기를 비는 간절한 제 희망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기꺼이 바라며.
당신의 친구 왕찬스.

영국에 있는 한 중국인이 도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매우 화제가 되고 있다. 이 편지는 도산 선생이 여행 중에 빌린 돈을 갚은 것에 대한 감사의 편지이다. 어째서 이 편지가 화제가 되는 것일까?
도산 선생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실 때 풍족한 돈을 갖고 다니시지 않았다. 당시 한국인들의 경제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점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도산 선생은 있는 돈도 정당하지 않으면 쓰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했다.
청도회담에서 있었던 밀산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이 어려워지자 도산 선생은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톡까지 온 여행경비는 이종호의 후원금으로 충당되고 있었다. 도산 선생은 뜻이 다른 사람의 돈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이종호의 후원금을 되돌려 주었다. 이후 경비가 모자란 상황에서도 시베리아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을 돌보면서 모스크바, 독일,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그만 여행경비가 바닥나고 말았다. 난감해진 도산 선생은 런던에서 무조건 중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을 찾아가 주인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다행이 왕찬스라는 중국인이 여비를 빌려주어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왕찬스는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자선을 베푸는 마음으로 여비를 준 것이었으며, 돌려받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도산 선생은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지켜, 빌렸던 돈과 함께 감사의 편지와 선물을 보냈던 것이다. 이에 감동한 왕찬스는 오히려 도산 선생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는 도산의 진실함과 신의, 정직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고: 도산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1999).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도산 선생의 생애]
박현환(1954), [속편 도산 선생]. 삼협문화사)

왕찬스가 도산 안창호 선생한테 보낸 감사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