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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입병합 이후 외국의 한국인들
2. 흥사단 창립
3. 그것이 알고 싶다.
4. 집중탐구 : 멕시코의 노예이민
5. 도산 선생 멕시코 가다
6. 도산 선생 하와이 가다

1. 한입병합 이후 외국의 한국인들
한국인? 일본인?
1910년 한일병합으로 한국정부가 사라지면서 한국인들은 공식적으로 일본인이 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故 손기정 옹이 일장기를 달고 이 대회에 참가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당시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도 당연히 일본인이 되었을까? 하지만 중국 상해의 임시정부는 한국정부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었지 않았는가?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해외의 한국인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한국인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이는 해외한인들의 뚜렷한 국가의식과 강력한 의지로 얻을 수 있었던 결과이기도 하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정부는 해외에 사는 한인들까지 일본정부의 공관지배하에 넣어보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도산 선생 선생이 중심이 된 국민회는 1913년 6월 30일 이같은 일에 항의하고 미국정부에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국무장관 브라이언은 같은 해 7월 2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한국사람은 일본사람이 아니라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의 전보를 받았다. 그 전보에서 재미한인은 대개 한일합병 이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고 한일합병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일본정부와 관계가 없고 일본관리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은즌, 이로부터 재미한인에게 관계되는 일은 공과 사를 막록한고 한인기관과 교섭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선언문에 의하여 국민회는 재미한인 대표기관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미국정부는 재미한인에 관한 일은 국민회를 통해 처리하였으며, 따라서 중국 등지를 거쳐 여행권이 없이 도미한 한국사람들이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으로써 입국허가를 받을 수가 있었다

(참고: 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선생 안창호』. )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경축행사(1915)

2. 흥사단 창립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흥사단이라는 민족운동단체가 설립되었다. 흥사단은 도산 선생이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단체로 수양과 함께 인재양성, 그리고 민족독립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흥사단은 신민회의 청년학우회 운동 등이 해외로 확장된 결과이다.
흥사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민족부흥을 위한 민족의 힘을 기르는 데 있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덕(德)·체(體)·지(知)의 3육(三育)을 동맹수련(同盟修練)해야 하며, 국민 모두가 민족사회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흥사단에서는 다음과 같은 힘의 3대 원칙을 주장한다.

① 자력주의: 우리가 믿고 의지할 것은 우리의 힘뿐이라는 원칙
② 양력주의(養力主義): 힘은 기르면 자라고 기르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원칙
③ 대력주의: 큰 힘이 있으면 큰 일을 이룰 수, 있고 힘이 작으면 작은 일밖에 이루지 못한다는 원칙
또 흥사단은 국민 개개인이 건전한 인격자가 되기 위하여 4대 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주장한다.
① 무실(務實): 율곡(栗谷) 이이가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 속의 '논무실위수기지요(論務實爲修己之要)'라는 제하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용어로, 참되기 운동·거짓말 안 하기 운동이다.
② 충의(忠義):사물이나 일을 대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며, 사람을 대할 때에는 신의와 믿음으로 대하여야 한다.
③ 용감:옳음을 보고 나아가며, 불의를 보고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말한다.
④ 역행(力行):행하기를 힘쓰자는 뜻으로, 실천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하의 흥사단과 흥사단원들은 '안악사건', '105인사건', 3·1운동, '동우회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였으며, 1926년에는 월간지 『동광(東光)』을 창간하여 1933년까지 40호를 속간하기도 하였다.

(참고: 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선생 안창호]. )

도산 선생이 직접 도안한 흥사단기 그림 1932년∼1970년 흥사단이 사용한 중앙단소
(로스앤젤레스의 남가주대학교(U.S.C) 안)

3. 그것이 알고 싶다.


캘리포니아 쌀의 기원

1990년대 한국의 농산물시장이 개방되면서 농민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생산된 쌀의 수입문제였다. 쌀은 전세계적으로 두 종류가 재배되고 있는데,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쌀은 한국이나 일본에서 먹는 쌀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주의 쌀은 값도 월등히 쌀뿐만 아니라 그 종류도 한국이나 일본에서 먹는 것과 같은 종류라서 한국의 쌀시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한 가지 궁굼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인들은 쌀을 잘 먹지도 않는데, 어떻게 해서 쌀농사를 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도산 선생이 미주에 있는 한인들의 삶의 향상과 독립운동을 위한 노력의 결과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도산 선생의 곁에서 활동하시던 최희송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미국에서 (반신불수가 된) 추정 이갑씨를 위해서 그렇게 돈을 보내고, 늙은 친구 5, 6명이 돈을 내어 그 고마운 돈을 보내고는 여러 날 동안 그저 울기만 했대요. 도산 선생의 가족생활비는 송종익군이 특별히 전력을 다해서 그전부터 대었지만 한 10년 동안 댔습니다.
그러면서 생활비는 좌우간 우리들이 대일터니 그냥 계속해서 민족운동을 다시 전개하자고 흥사단이 조직되었지요. 그렇게 조직된 뒤에 나는 3년만인가만에 가보았지요 민족운동을 하려면 우선 흥사단에 들어가야겠다고 장리욱 씨하고 둘이 처음 찾아갔습니다.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고 이 꼴이 된 것이 좋은 조직이 없어서 이렇게 되었소. 힘에는 단결력· 금전력·신용력 세 가지가 있는데, 이 세 가지가 조직화하면 안될 일이 없소. 그런데 당신들이 공부는 할데까지 하되 우리의 민족을 위해서 일하는 데는 우선 단결하지 않으면 안되오"하셨습니다. 나는 그 때에 사고력이라든지 모두가 유치해서 듣고만 있었으나 장리욱씨는 느낀 바가 상당히 컸던 모양입니다. 그 때 우리 둘은 동시에 입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도산 선생은 동포의 경제운동을 주장하셨습니다. 민족운동을 하는데도 개인생활 하는데도 물질이 필요하다는 실제문제를 중요시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북미실업주식회사'였는데 주식 한 주에 50달러씩으로 하고 주주는 멕시코에 있던 동포까지 한해서 1,000명에 달하였지요. 그 회사에서는 6만 달러나 모아가지고 벼농사를 시작해서 돈을 상당히 벌었습니다.
이 벼농사는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명산물이 되었지요. 그 때 캘리포니아 주에는 벼농사가 없었는데 도산 선생 선생이 처음으로 시작했단 말이예요. 임준기라는 서울 사람을 데리고 멀리 황무지를 답사하고 적당한 곳을 논으로 개척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운동이 잘 발전된 것이 1917년인가 합니다.

(참고: 박현환 편(1954). 『속편 도산 선생 안창호』 삼협문화사.)

4. 집중탐구 : 멕시코의 노예이민


우리 한인 이민 선조들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재정립할 수 있는 하와이 이민 사회에 반해 우리의 미주 이민 역사 속에는 묻혀져 있는 또 하나의 역사가 살아 있는 곳이 있다. 멕시코 노예 이민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를 펴내 각계의 주목을 받은 이자경 '미주 한인 100주년 기념사업회 LA' 역사분과 위원장은 "멕시코 이민은 한국의 근·현대 해외 이민사에서 단 1회로 끝난 최소 집단이었고, 형식적으로 4년동안의 계약 노동이었지만 부채 노예라는 특이한 농노이민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교는 물론 인적 교류도 전혀 없던 라틴 문화권인 멕시코로 떠난 특이성과 함께 그 이면에는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서울에 지사를 설립한 일본의 이민 전문 '대륙신문회사'와 멕시코 유카탄의 에네킨 농당 대리인 자격인 마이어스(John Myers)가 결탁한 국제 이민 브로커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민 사기극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멕시코 탐피코에서 김익주가 세운
한옥2층 건물(1918년)

즉, 1905년 3월 6일 제물포를 떠난 남자 802명과 여자 231명 등 모두 1,033명의 한인들은 1개월의 항해 후에 멕시코 유카탄 반도내 24개의 에네킨(어저귀) 농장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4년간이라는 제한이 있었을 뿐 하루 12시간 노동을 하였다. 당시 임금으로 남자 장정은 35센트였으며 청소년은 25센트, 어린이는 12센트를 받는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을 겪어야만 했다.
이들 부채 노예의 특징은 농장 내 매점을 통해서만 물품 구입해야 하는 강제성 구입 제도 및 외상 제도를 통해 계속 빚을 지게 만들어 자녀까지 영속적 노예로 발을 묶어 놓았다고 한다. 4년 노동 계약이 끝나서야 첫 농장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가 허락되었는데, 1910년 날아든 일제의 강제 병합 소식은 계약이 만료된 후에도 멕시코 노동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계 전역으로 흩어지게 됨으로써 잊혀진 주인공이 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시의 멕시코 이민은 단 1회로 끝나고 말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멕시코 이민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대륙신문회사'는 하와이로 보낼 노동자 모집 만을 허가받았을 뿐, 멕시코 이민에 대해서는 정부의 허가를 받지도 않은 상태였다. 더욱이 당시 한국은 멕시코와 외교관계에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신문회사'는 한성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였으며, 여권도 없이 한국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멕시코로 보냈다.
아무튼 멕시코행 이민 사건은 이민 예정자들 중에 천연두가 발견되어 배에 탄 한인 전부가 소식이 두절된 채 격리되었을 때 일어났다. 당연히 이들 천 명의 한국인들이 멕시코에 노예로 팔려갔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으며, 한국정부가 이 소식을 알게 되어 이민금지를 단행했을 때는 이미 배가 멕시코 유카탄을 향해 떠난 상태였다.

(출처: 코리아나뉴스 http://www.koreananews.com/1xx/14x/141/141cov.htm
Patterson, W.(1988). The Korean Frontier in America: Immigration to Hawaii, 1896-1910. 정대화 역(2002). [아메리카로 가는 길: 한인 하와이 이민사, 1896-1910], 서울: 들녁.)

멕시코순방도중 교민들과 함께

5. 도산 안창호 선생 멕시코 가다
재멕시코 동포의 초청으로

1917년 10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14개월 동안 도산 선생이 멕시코를 방문하여 교민들을 대상으로 연설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번 행사는 멕시코 교민들이 직접 도산 선생 선생에게 여비를 보내줌으로써 성사될 수 있었다. 물론, 그동안 대한인국민회 총회에서 멕시코에 의원을 파견하기로 하기로 하고, 멕시코에서도 북미지역의 대한인국민회와 연락을 주고 받기를 희망하였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제대로 연락을 하지 못하던 처지에 이루어진 방문이라 더욱 뜻깊다고 할 수 있다.
도산 선생 선생은 당초 7개월 가량의 일정으로 멕시코를 방문하였으나, 이 지역의 상황을 좀더 돌아보며 경제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체류기간을 연장하였다. 도산 선생 선생은 멕시코의 베라쿠르스, 콰사콸코스, 푸론테라, 유카탄, 탐피코 등지를 순방하였는데, 일본인의 사기에 휘말려 노예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멕시코 교민들에게 선생의 방문은 민족적 긍지와 단결력을 드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멕시코의 한인들의 생활모습과 멕시코에서 도산 선생 안창호 선생의 역할을 보여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어 이를 소개한다.

멕시코에 있던 동포들이 도산 선생에게 좀 오셔 달라고 여러 번 간청하므로 할 수 없이 멕시코에 가서 14개월 동안 계셨는데, 그동안에 동포들이 모든 생활상태라든지 도의심이 잘 갖춰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멕시코의 동포들은 어저귀 재배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도산 선생이 가서 지도하시기 전에는 거저 멕시코 농장주인이나 관계되는 사람들을 속이고 협잡을 해서 동포의 신용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조선민족하고 일하다가는 망친다. 그들은 나쁜 민족이다." 이런 악평이 돌았었습니다. 그런데 도산 선생은 그곳에 가서 이런 말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즉,
"어저귀 한단 묶는 것이 곧 나라일이다"
이렇게 열심으로 지도한 보람으로 일에 대한 태도가 아주 딴판으로 개량되었던 거요. 그래서 우리 동포는 신용을 회복했을뿐 아니라 멕시코 정부에서도 상당히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신문에서는 "안창호라는 지도자가 오더니 조선동포들은 과연 명목이 일신하여 일에 열심스럽고 정성을 들여서 농장에 큰 이익을 올리게 하였다"고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 당시 멕시코에 사는 한인 어부들의 생활을 관찰하면서 도산 선생이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가정용 혹은 공용 변소가 없다는 점이었다. 도산 선생이 살펴보니 남자들이 아침에 해변에 나가서 슬슬 돌다가 홀연히 없어지거나, 어떤 사람들은 몸을 감출 곳을 못찾아 애를 쓰면서 돌아가곤 하였다. 그날밤 도산 선생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동방예의지국 백성으로서 아무리 외국에 나와서 어촌생활을 하지만 조상때부터 가지고 내려오는 예절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각자 자기 집에 변소를 만들라'고 권유하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을 들고서 그러겠다고 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 변소를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도산 선생은 친히 소매를 걷고 삽을 들고 나가서 땅을 시작한 즉, 그제야 사람들이 일제히 나와서 '도산 선생 선생님, 우리가 파겠습니다'하면서 저마다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우고 벽을 부처서 집마다 변소가 생겼다.
그 중에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이는 부인들이었다. '선생님이 오셔서 큰일 하셨습니다' 그같이 하여서 남자들은 생선을 수확하면 부인들은 생선을 시장에 팔아 상당한 소득을 얻게 되었으며, 집집마다 궤 속에 돈을 저축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는 은행이 없어 돈을 개인적으로 따로 보관하였다)"

(참고: 박현환 편(1954). [속편 도산 선생 안창호] 삼협문화사.)
(참고: 곽림대(1968). [안도산 선생])

6. 도산 선생 하와이 가다
분열된 동포사회 결속을 위하여

1917년 도산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자격으로 하와이를 방문하였다. 이는 1912년 이래 서서히 분열되기 시작한 하와이 한인동포사회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도산 선생 선생이 7개월 동안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분열은 회복되지 못하였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02년부터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기 시작하면서 호놀룰루에 대한인국민회가 성립되었다. 1912년 하와이 지방총회는 북미지방총회의 박용만을 초빙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교육사업을, 박용만은 신문주필의 역할을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박용만이 하와이에 온 첫날 환영회석상에서 중학교 설립의 촉진을 언급하자, 이승만은 박용만이 월권하여 하와이 한인 사회사업을 장악하려고 한다고 의심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박용만은 "산넘어 농장"(대조선국민군단)에 위치를 정하여 군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물정을 잘 모르는 동포들을 속이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승만과 박용만 등 두 명의 주도권 다툼에서 시작한 불협화음은 하와이 동포들의 분열로 이어져, 신문사 파괴 및 회관 봉쇄 등의 문제들이 발생하고 미법원에 소송을 거는 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정소비가 막심하고 인심도 크게 흩어져, 한인동포들은 서로를 원수취급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러자 중도파 인물들이 주동이 되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인 도산 선생을 초청하여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와이로 간 도산 선생 선생은 이승만과 박용만 등을 만나기를 원했으나, 이들은 모두 만남을 회피하였다. 별수 없이 선생은 수십차례 연설회를 갖고 동포들을 직접 설득하기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공동대회를 통하여 동포사회의 통합결의를 이끌어 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동안 회피만 하던 이승만과 박용만은 도산 선생을 만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산 선생은 두 사람을 만나서 사회에 미치는 불행은 인도자의 책임임을 강조하여 두 사람의 악수를 권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용만의 독립군 조직인 "산넘어 군대"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승만과 박용만의 갈등은 그 뒤로도 해결되지 못하고 결국 일부 국민회원들이 분리하여 민단(교민단 이후 동지회로 변경)을 조직하게 된다.

(참고: 곽림대(1968). [안도산 선생])



대조선국민군단의 사열식(1914년):
박용만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 내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설치하였는데,
단원들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산너머 농장'에 있다고 해서
'산너머 병학교'라고도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