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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인 유학생들 독립선언하다
2. 외국언론이 바라본 3.1 운동
3. 한국임시정부 세 곳에 설립
4. 임시정부 통합
5. 상해 임시정부 분열위기
6. 국민대표회의 개최

1. 한국인 유학생들 독립선언하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1919년 2월 8일 도쿄의 YMCA 강당에서 5백 여명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벌였다. 연락을 받고 출동한 일본무장경찰들은 시위 중에는 접근을 못하고 있다가, 시위가 진정되고 나서 강당에 침투하여 전원을 체포하였다. 체포된 유학생은 도쿄의 경찰서에 분산 수감되었다.
이 시위는 1917년 제 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1918년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선언한 <14개조 평화조약 원칙(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확산되기 시작한 식민지 독립의지가 한국에까지 미쳤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이후 활동을 예상할 수 있게 해준다.

도쿄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은 대전 후의 세계적 움직임을 알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시기가 되었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 고베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는 『Japan Advertiser』라는 신문이 1918년 12월 1일에 "미국에서 안창호·서재필·이승만 등이 해외지도자 전체회의를 열고, 이승만·정한경·민찬호 등 세 사람을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로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2.8 독립선언이 있었던 일본 도쿄의
기독청년회관 입구에서 찍은 유학생 사진:
기독청년회관은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다.

이어서 12월 15일 『아사히신문』에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 독립운동자금을 30만엔을 모금했다고 보도하였다. 이들 기사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의 조국독립의지를 크게 자극하였다.
이에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도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김도연·백관수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송계백을 국내로, 이광수를 상해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 및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참고: 동명여자고등학교, 국민일보 2001년 02월 20일 [기타] (화) 12:39)

2. 외국언론이 바라본 3.1 운동


1919년 3월 1일 일제가 무단으로 통치하고 있는 한반도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 운동은 구 대한제국의 광무황제 장례식날인 3월 4일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정보가 일본경찰에 누설되자 일정을 앞당겨 장례예행 연습일인 3월 1일에 시작되었다.
한반도의 정세를 알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은 3·1 운동은 일본의 억압적인 통치정책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로 바라보고 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교의 크레인(T.A.Crane) 교수는 모든 한국인들을 사실상 농노로 만들려고 하는 일본의 정책의도로 인하여 3·1 운동이 일어났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일본이 한국민에 대한 자신의 의무는 거의 고려하지도 않고 일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모든 한국인들을 착취만 하고 있음을 비난하였다.
더욱이 이 운동은 자주독립을 원하는 한국인들의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주었으며, 일본경찰의 폭력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평화의지를 보여주었다. 3·1 운동과 관련하여 미국 보스턴시 국제개혁국의 트윙(E.W. Twing) 동양부장의 기고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의 능력과 용기와 조직을 세계에 포명(佈明)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 땅에 자행되고 있는 일본의 군사적 독재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불합리하며, 불의하며, 잔혹하며, 야만적이라는 사실이 이번의 독립운동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나는 이번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태를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경찰과 군인들은 늙은이와 어린 아이들을 체포하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3월에 이러한 광경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수십 명의 선교사들과 기타의 인사들이 한국 도처에서 목격한 바이다. 만약 세계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기만 했더라도 그들은 피압박 민족의 이 바탄(悲嘆)에 귀를 기울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본은 이와 같은 참상이 세계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부리고 있다. 지방의 어느 도시에 방금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그 도시에서는 선교자에 대한 압력이 무척 심각한데, 심지어 선교사들에게 진상을 말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는 한 추방시키겠다고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의 사실들은 내가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1) 어린 남학생들이 일본군에게 맞고 고꾸라졌으며, 가혹하게 구타당했다. 이는 그들을 체포하는 문제와는 별개로서 아무리 해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야만적인 잔혹행위이다.
(2) 군대들이 와서 멈추더니 아녀자들만으로 이루어진 군중에게 고의적으로 발포했다. 그들은 다만 만세를 불렀을 뿐이다.
(3) 한 살 밖에 되지 않는 어느 어린아기는 등에 총을 맞았다.
(4) 수명의 일본군들은 65세의 무저항적인 한 노인을 쥐어박고 걷어차고 구타하여 걸을 수도 없이 만들어버렸다.
(5) 약 20명의 여학생들이 대열을 이루고 아무 소리도 외치지 않았으며 조용히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쫓아와서 총으로 구타하고 거꾸러뜨리고 너무도 치욕적으로 대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피가 끓어오름을 금할 수 없게 만들었다.
(6) 긴 쇠갈고리를 든 일본 소방대들이 소년·소녀들을 쫓아가서 갈고리로 잡으려 했다.
(7) 어느 한국인은 이 쇠갈고리로 머리를 맞아 혼수상태가 된 채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8) 어느 사람은 등에 총을 맞고 죽어가고 있었다.
(9) 1백명의 남자들이 찢어진 피투성이 옷을 입고 포승에 함께 묶여 감옥으로 끌려갔다.
(10) 어느 미국인 선교사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자기 뜰에 서서 밖을 내다보다가 거칠게 체포되었다.
(11) 아낙네들이 총에 맞아 고꾸라지고 발길에 채어 하수구로 빠졌다.
이와 같은 사실과 그 이외에도 많은 사실들을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다른 외국인들도 이와 같은 광경과 이보다 더 끔찍한 광경들을 목격했다. 한국의 각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공포정치를 사람들은 다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서와 감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형벌과 고문에 관한 이야기는 이보다 더욱 끔찍하다. 나는 일본인들에 의해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구타당하는 남자를 본 적이 있다.

(참고: Calton Waldo Kendall (1919.7). 『한국의 진상』 The Truth about Korea. 신복룡 역(1999).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 6권) 서울: 집문당.)


3.1 운동 당시 동대문에 올라가서
시위하는 사람들
3.1 운동당시 덕수궁 앞을 지나가면서
시위하는 사람들

3.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 곳에 수립


본격화된 독립운동

한반도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것에 계기로 국내외에 6∼7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중 전단적 성격의 정부를 제외하고 블라디보스톡, 상해, 서울 등 세 군데에서 임시정부가 따로 설립됨으로써 앞으로 혼란이 예상되었다.
제일 먼저 내각을 발표한 임시정부는 블라디보스톡(해삼위)의 대한국민의회정부로 1919년 3월 21일이었으며, 상해에서는 4월 17일에, 그리고 서울에서는 4월 23일에 각각 발표되었다.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에서 집정관 총재로 임명된 이승만은 외국에 자신을 대통령(President)이라고 발표하고 외교활동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사람들은 각기 따로 설립된 세 개의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각각의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내각의 명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표된 내각(1919년 3월 21일)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탁지총장 윤현진, 군무총장 이동휘, 내무총장 안창호, 산업총장 남형우, 참모총장 유동열, 강화대사 김규식.

상해에서 발표된 내각(1919년 4월 17일)
임시의정원(국회)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법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서울에서 발표된 내각(1919년 4월 23일)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총장 노백린, 법무총장 신규식, 노동국총판 안창호, 참모부총장 유동열


도산 선생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서리 겸 내무총장으로 취임

도산 선생이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서리 및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처음 발표할 때에는 임시로 국무총리직을 이승만으로 내정하였으나, 그가 서울의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활동하자 도산 선생이 국무총리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미주에서 모금한 6천 달러를 임시정부에 전하고 활동을 도울 목적으로 상해에 도착한 도산 선생은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복무하면서 공석으로 있는 국무총리직 서리를 맡아 초기 임시정부의 계통을 세워나갔다.
도산 선생은 취임하면서 몇 가지 개혁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번째는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연통제 실시를 발표한 것이다. 연통제는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된 것으로, 임시정부의 국내외 업무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든 행정조직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 조직된 것이다. 연통제는 과거 도산 선생이 주도했던 신민회의 비밀조직원리를 따르고 있다. 이 조직의 주요 사무는 정부에서 공포하는 법령과 공문의 전포(傳布), 전쟁시 군인 ·군속의 모집 및 군수품의 징발 수송, 구국금(救國金) 100원 이상을 갹출할 구국재정단원의 모집, 공채발행시 발매업무, 통신에 관한 것 등이다.
둘째, 임시정부의 기관지로서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이 신문은 1896년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과는 다른 종류의 신문이다. 이 신문은 창간사에서 이 신문의 사명을 ① 독립사상 고취와 민심통일, ② 독립사업과 사상 전파, ③ 유력한 여론을 환기하고 정부를 독려하여 국민의 사상과 행동의 방향 제시, ④ 새로운 학술과 새로운 사상 소개, ⑤ 국사(國史)와 국민성을 고취 개조한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비록 임시정부의 기관지였으나, 도산 선생의 독립운동의 방침을 직접 소개하는 등 선생이 깊이 관여한 신문이다.
셋째, 임시정부 내에 사료편찬위원회를 설치했다. 도산 선생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해 절실한 한 가지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현재 민족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도산 선생이 총재가 되고 이광수, 김두봉, 김병조, 이원익, 장붕, 김여제, 김홍서, 박현환 등을 위원으로 하여 구성된 사료편찬위원회는 이후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편찬하였고 당시 수집된 자료에 의거하여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과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가 간행될 수 있었다.
넷째, 일제가 강제병합에 앞서 1909년 7월에 일본적십자회 강제편입되었던 대한적십자회를 다시 내무부령 제62호를 통하여 설립하였다. 그리고 간호원 양성소를 개설하였는데, 독립전쟁이 일어날 경우 나이팅게일과 같은 간호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도산 선생은 이후에도 여러 여성독립운동단체들의 형성을 격려했는데 대한 애국부인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참고: 국사편찬위원회(2001). [한국사: 48.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국사편찬위원회(2001). [한국사: 51.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1919년 9월 17일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 기념사진.
이 회의에서 세개의 임시정부들이 통합되어 새로운 임시헌법이 마련되었다.
맨 앞 가운데가 도산 선생이고 두번째 줄 맨 오른쪽은 백범 김구 선생이다.

4. 임시정부 통합
상해를 중심으로

3·1운동 이후 일시에 발표되어 독립운동에 혼선을 야기했던 세 지역의 임시정부가 상해를 중심으로 통합됨으로써, 명실공히 독립운동의 최고 구심점으로 기대를 받게 되었다.
세 지역의 임시정부는 각자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통합이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서리 겸 내무총장인 도산 선생의 통합노력으로 서로 한 발씩 양보함으로써 통합이 가능하게 되었다.
서울의 한성정부의 경우 임시의정원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임시의정원은 이미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성정부에서 최고수반으로 추대된 이승만이 이미 미국에서 한성정부의 대통령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성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외교 공신력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상해임시정부로부터도 각료로 추대된 이승만이 굳이 한성정부의 명칭을 사용한 이유는, 자신이 한성정부의 최고수반으로 추대되었다는 점과 함께, 한성정부에는 상해임시정부와는 달리 의회의 견제장치가 없는 관계로 절대권력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통합에서 실질적인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상해의 임시의정원과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국인의회의 통합문제였다. 왜냐하면 이 두 지역의 조직은 개별적으로 의회, 행정, 사법 등의 모든 국가기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임시정부의 통합이 가장 절실하다고 생각한 도산 선생은 상해와 블라디보스톡의 이해관계를 벗어난 한성정부의 조직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정부개조안을 제시하고 합의를 이루었다.

① 상해와 노령에서 설립한 정부들을 일체 작소하고, 오직 국내에서도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인 것을 인정함이다.
② 정부의 위치는 아직 상해에 둘 것이니, 각지에 연락이 비교적 편리한 까닭이다.
③ 상해에서 설립한 정부의 제도와 인선을 작소한 후에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제도와 그 인선을 채용하되, 상해에서 수립 이래 실시한 행정은 그대로 유효를 인정할 것이다.
④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라 할 것이니, 독립선언 이후에 각지를 원만히 대표하여 설립된 정부의 역사적 사실을 살리기 위함이다.
⑤ 현재 정부 각원은 일제히 퇴직하고 한성정부가 선택한 각원들이 정부를 인계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1919년 8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총재 이동휘를 비롯한 한성정부 각원 명의로 <국무원유고문(國務院諭告文)>을 발표함으로써 통합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8월 30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상설의회 총회를 열고 상해 임시정부쪽 파견원이 참석한 가운데 해산을 선언했다.

(참고: 국사편찬위원회(2001). [한국사: 48.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임시사료편찬위원의 임원들(1919년 7월 17일):
도산 선생(뒷줄 가운데)이 총재직을 맡았다

5. 상해 임시정부 분열위기


도산 안창호 노동국총판직 사퇴

상해를 중심으로 통합되어가던 임시정부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3.1 운동 이후 서울· 상해·블라디보스톡 등 세 지역에서 따로 발표된 임시정부는 1919년 8월 상해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됨으로써 독립운동의 최고 구심점으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독립전쟁론·외교론·준비론 등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내부 분열과 대통령인 이승만의 독선, 기호파와 서북파의 지방열 등이 겹쳐 그 역할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한때 국무총리 이동휘와 노동국총판 안창호, 그리고 젊은 차장들을 중심으로 제도 개혁을 통해 임정을 강화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반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급기야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북경 군사통일통의회의라는 새로운 독립운동 세력이 결집하자, 1921년 초에 이동휘와 안창호 등은 자신의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도산 선생은 1921년 5월 12일과 17일 이틀동안 국민대표회의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노동국총판직 사퇴이유를 언급하였다. 도산 선생은 이 연설에서 현재 임시정부의 독입운동세력들이 분열되어 활동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분열에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기에 더 이상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을 수 없다고 해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군사운동·외교운동·재정운동·문화운동·식산운동·통일운동 등 여섯 가지가 서로 관련을 맺으며 골고루 이루어져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도자들이 이들 중 어느 하나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분열이 발생하였으며 앞으로는 각각의 분야을 통합하는 균형된 정부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를 위해 도산 선생은 현재 각 독립운동세력과 그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두 드러내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통일된 정부를 만들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참고: 이만근(1986). [도선어록: 도산 안창호 새자료집] 흥사단출판부.)


이승만대통령 환영회 석상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1920. 12. 28)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6. 국민대표회의 개최


임시정부의 새로운 방향 모색

이동휘와 안창호 등 임시정부를 끝가지 지키고자 했던 인사들이 자리에서 물러남에 따라 임시정부의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들 목소리는 한국 및 세계 각지의 한겨레 동포들의 대표들이 회의를 통해 국가조직체제에 대한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먼저 1921년 2월 박은식, 원세훈, 왕삼덕 등 14명이 상해에서 <우리 동포에게 고함>을 내놓음으로써 국민대표회의가 구체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21년 4월 박용만, 신채호 등 북경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기하였다. 1921년 5월에는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조직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필요하다는 연설회가 열렸다. 이 연설회에서 여운형은 임시정부 내부로부터의 개혁은 공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세계의 국민대표들이 모일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도산 선생 역시 처음 임시 정부를 세울 때 각 방면의 의견을 충분히 구하지 못한 한계를 인정하고 임시정부를 더욱 견고한 민족적 통일기관으로 만들려면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도산 선생이 독립운동의 방법을 적어 놓은 글: 교육을 바탕으로 정치인·군인·외교가· 학자 등의 인재가 양성되고, 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외교비·군비·건설비 등의 국가재정을 구할 수 있으며, 인재양성과 재정확보가 제대로 되어야 비로소 독립된 정부를 만들어 광복과 국가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그 결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옹호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비상한 관심 속에 시작되었다. 이 기간 동안 참가한 지역 및 단체는 135개이며 대표는 158명이었다. 그러나 회기 동안 자격심사를 받아 대표로 확정된 인원은 125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도산 선생의 대표자격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왜냐하면 도산 선생이 대표한 미주 대한인국민회에서 파견한 대표들에 의해 미국정부에 위임통치안이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임통치 문제는 담당한 이승만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정부에 주목을 끌기위해 독단적으로 발표한 것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도산 선생은 대표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23년 1월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임시회의는 의장에 김동삼, 부의장에 윤해와 안창호, 비서장에 배천택, 비서 김철수·오창환·박완삼 등을 선출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3월부터 정식회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회의 도중에도 임시정부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대립하면서 1923년 5월 63회를 끝으로 국민대표회의는 막을 내렸다.

(참고: 국사편찬위원회(2001). [한국사: 48.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1999).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도산 안창호의 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