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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도산의 입국 거부
2. 미주 한인들 정신적·경제적 어려움 봉착
3. 집중탐구 : 도산의 이상촌 건설 노력
4. 유일당 결성되다
5. 중국과의 공동전선 구축
6.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 의거

1. 미국, 도산의 입국 거부


▒ 잠시 공산주의자로 오해

도산 선생이 1924년 12월 1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하여 교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도산 선생이 미국으로 돌아온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상해의 임시정부가 성공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워지면서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국에서 활동중인 서재필 박사를 만나보고자 하였다. 둘째, 당시 미국동포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살피고 열심히 노력할 것을 격려하는 동시에, 크게 줄어든 독립운동 자금지원을 요청할 필요성이 있었다. 셋째, 여러 해 동안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나 자신과 가정의 안정을 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한 때 미국정부가 도산 선생의 입국을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도산 선생은 미국이 비자발급을 거부함에 따라, 중국정부로부터 발급받은 중국인 여행권으로 미국에 입국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도산 선생의 미국입국을 위해 중간에서 중재역할을 하였던 서재필 박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고 한다.

  서재필 박사와 도산 선생:
도산 선생은 일찍이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지만,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 박사와 함께 활동한 적은 없었다. 두 분은 서로를 만나보기를 바랬지만 이루어지지 않다가 1925년에 비로소 독립에 대한 생각을 나누게 된다.


"안창호가 미국에 들어오려는데 주 상해 미국 영사가 비자를 내주지 않고 있소. 그래서 입국 비자를 받기 위해 미국 국무성에 교섭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그 일을 상원의원 스펜서에게 부탁하였소. 그런데 오늘 스펜서의 말이 국무성에서도 안창호의 입국비자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한국인 인도자로서 지금 워싱턴에 주재한 인물의 말에 의하면 안창호는 공산당원이라 하니 비자를 발급할 수는 없오'라는 회답을 받았다고 하오.

서재필 박사는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인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인 인도자라는데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라고 말함으로써 그 '한인 인도자'가 미국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알만한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 한인 지도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의도로 도산 을 공산주의자라고 흑색선전을 했는지 의혹이 일고 있다."

(참고: 곽림대(1968), [안도산]
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2. 미주 한인들 정신적·경제적 어려움 봉착


▒ 도산 선생 미국 전역 순회 격려

1925년 도산 선생이 미국에 갔을 때 한인사회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혼란해진 영향으로 미주지역의 교민사회도 급진파와 점진파 등으로 분열되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주 한인사회의 경제적 곤란은 1924년 벼농사의 실패로 시작되었다. 1910년대 도산 선생이 주도한 북미실업주식회사의 성공에 따라 캘리포니아 지역의 한인 농업자들과 노동자들은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으며, 한인들은 대부분의 자본을 들면서 세 개의 거대농장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비바람으로 벼농사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커다란 빚더미에 오르게 되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소송을 걸어 책임을 묻기 시작하였으며, 서로를 의심하는 등 민심도 매우 사나와졌다.

  미국순회를 마친 얼마 후 중국 상해에
도착했을 때 당시 도산 선생

도산 선생은 동포사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위로를 하고 서로 단결하여 열심히 생활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미주 전역을 순회하였다. 실제로 도산 선생의 품성을 익히 알고 있던 동포들은 교민 사회에 '따스한 공기'를 강조하는 그의 진실된 말과 행동을 보고 감동하였으며, 이를 통해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도산 선생의 미주 순회는 4월부터 7월말까지 4개월 동안 이루어졌으며, 이 기간 중에 덴버, 시카고, 필라델피아, 뉴욕, 뉴헤븐, 보스톤, 폴우리버, 다뉴바, 사우스벤, 디트로이트, 캔사스, 와밍햄 등의 미국 동부지역과 스탁톤, 다뉴바, 삭클라멘트, 샌프란시스코, 보스톤, 풀리버 등의 미국 서부지역을 방문하였다. 또한 도산 선생은 그 중간에 몰몬교의 본산인 솔트레이크를 방문하여 이상촌(모범촌) 건설을 위한 조사도 함께 수행하였다.

(참고: 곽림대(1968). [안도산]
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전영택 편(1967). [도산 선생], 대한기독교 계명협회.)

미국순회 도중 장리욱과 함께 한인 경영 농장을 방문한 도산 선생

3. 집중탐구 : 도산의 이상촌 건설 노력


도산 선생은 1926년 2월 미국을 떠나 중국을 향하였으며 4월에 홍콩에 도착하였다. 1년 4개월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세번째로 중국에 입국한 것이다.
도산 선생이 1924년 미국에 가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상촌 혹은 모범촌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목적이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당시 미국의 한인사회가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관계로 미국에서는 자금모금보다는 한인사회를 안정시키는 활동에 더욱 큰 비중을 두셨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생은 미국에서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자 다시 중국을 향하셨던 것이다.
선생이 생각한 이상촌은 사실 자주독립하여 한민족 누구나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한국의 미래모습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해외를 떠도는 우리민족이 잠시나마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는 일정한 마을을 건설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이 이상촌인 것이다. 이런 이상촌은 단순히 자급자족하는 수준을 넘어서, 군사·문화·경제·교육 등이 자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그마한 국가조직이었던 것이다.
도산 선생의 이상촌 건설계획은 독립운동 초기부터 꾸준히 모색되어 오던 것이다. 1910년 망명 당시 있었던 청도회담에서 만주 밀산 지역에 무관학교를 세워 그곳에서 동포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고 한 결정은 도산 선생의 이상촌 계획의 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후 도산 선생은 유일 독립당 결성을 위해 동료들의 대동단결을 꾀하면서 동포들의 생활모습들을 돌아보면서 꾸준히 이상촌 건설에 적합한 지역을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길림성, 산해관, 금주, 호로도 등지를 이상촌 후보지로 보고 살피셨던 것으로 알려진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미국에 가셨을 때조차 몰몬교도들이 자급자족하는 솔트레이크를 방문하여 그 생활모습들을 확인하시기도 하였다. 이런 노력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계속 이어진다. 선생은 공산주의자라는 미국정부의 오해로 인하여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하와이에 잠시 머물러 한인사회를 방문하는 것조차 거부당한다. 결국 서둘러 배에 올라탈 수 밖에 없었으며, 어쩔 수 없이 직접 중국으로 가는 배를 못타고 오스트레일리아를 들려 홍콩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는데, 오스트레일리아의 부리스에인에서도 잠시 머물며 이상촌 건설 가능성을 탐색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9년에는 필리핀까지 직접 가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설치하고 필리핀 총독부를 방문하여 한인 이주를 논의하기까지 하였다.

(참고: 곽림대(1968). [안도산]
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전영택 편(1967). [도산 선생], 대한기독교 계명협회.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1999).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도산 안창호의 생애])

도산 선생은 1929년 이상촌 건설을 하고자 필리핀 마닐라에 들렸다.
필리핀 고산지대의 원주민들과 (1929년 4월 29일)

4. 유일당 결성되다


▒ 독립운동의 새로운 통일운동

1926년 5월 도산 선생을 중심으로 유일당(唯一黨)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경우에 따라 유일당운동, 민족유일당운동, 좌우합작운동, 민족협동전선운동, 민족통일전선운동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임시정부의 개혁을 추구한 국민대표회의가 해체된 이후 분열되어 있는 항일운동세력을 하나로 묶으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유일당 운동은 조상섭, 오영선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촉성회에서 출발하는데, 이 단체는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도산 선생을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추대하기로 한 결정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생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도울 뿐 국무령과 같은 요직을 맡는 일은 사양하였다. 대신에 '임시정부 존립과 대혁명당 조직'이라는 연설을 통하여 "우리들이 성취하려는 것은 민족적 혁명이다. … 장래 건설될 정체를 위해 싸우지 말고 주의를 다투지 말고, 이천만 동포가 공동일치하여 이민족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일당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유일당은 정당정치의 이념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었다. 이전까지 한국에는 이렇다할 정당의 이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임시정부 수립초기에 항일투쟁의 중심으로 정부조직과 정당조직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정부조직체의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유일당 운동은 임시정부 조직에 부담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노력 속에서 정당조직과 정부조직의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경험들을 축적해 나갈 수 있었다. 둘째, 유일당운동은 한국이 왕이 다스리는 왕정정치로부터 결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까지 독립을 조선왕조의 복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꾸준히 존재하였으나, 유일당운동은 독립을 국민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공화정치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셋째, 민족주의나 공산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민족의 대동단결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의 의미를 단순히 일본의 지배를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일본의 침략 속에 녹아 있는 제국주의에 반대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방향을 보다 더 정교화하였다.

(참고: 국사편찬위원회(2001). [한국사: 48.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1999).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도산 안창호의 생애])

광주에서 한일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있었는데 이에 광주를 비롯한 전국의 학생들이 항일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사진은 당시의 광주일보 기사

5. 중국과의 공동전선 구축


▒ 유일당운동의 국제확대

1931년 11월에 중한민중대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한국의 독립운동세력과 중국이 공동의 적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 힘을 합칠 수 있는 국제연대조직이다. 민족운동세력이 중국인들과 힘을 합치게 됨으로써 1925년 이후 점차 악화되어가는 독립운동세력이 힘을 발휘할 또 한번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중국 봉천성 간에는 소위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이 맺어, 만주지역의 한인들이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하고 독립단체들의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일제에 넘기며, 한인들의 실태를 조사하여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한인들끼리 연대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만주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1927년 도산 선생이 길림을 비롯한 만주지역의 실태를 돌아본 뒤, 중국인들에 의하여 한인학교가 폐쇄되고 빈민이 400만명에 달하며, 중국인 토지경작료가 세 배 이상 폭등해 독립군들도 먹을 것이 없다는 실정을 보고하며 울분을 토하였다.
이미 1920년 중국을 방문한 미국의회 의원단들과의 면담 속에서 일제가 중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으며 한국과 중국의 공동의 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던 도산 선생은,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중국인들에게 구축당하며 독립운동활동이 어려워진 이유가 일본이 중국인들과 한국인들 사이를 이간질한 일제의 계략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한인들끼리만으로 일제에 대항하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28년 이후 그동안 민족독립운동의 통일을 추구하던 유일당 운동에서 사회주의 진영이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세력에 영향을 주던 1928년에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서 발표된 '12월 테제'에서 민족부르주아 세력과의 연대를 파기하고 좌파중심으로 뭉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일당은 급속히 해체되었다.
도산 선생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기회로 유일당 원칙에 찬동하는 각 단체만을 모아 1930년에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또한 천진에서 '대한대독립당 주비회'를 구성하여 기관지 『조선지혈(朝鮮之血)』을 창간하고, 여기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민족주의의 목적은 제국주의를 타도하여 민족평등 실현을 기하는 데 있고", "일본제국주의는 중한혁명의 공통의 적"이라고 규정하여 한국과 중국의 동반관계를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이후 1931년 7월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들이 충돌한 소위 '만보산사건'이 발생하자, 중국 국민당정부에게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적극 보호해주도록 운동하였으며, 한인각단체연합회를 재결성하여 중국 당국인사들과 연합하기 위한 교섭을 진행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민족단체들의 교류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도산 선생은 1931년 10월 27일 중국 동북대표들을 초대하여 '중국동포에 경고한다'는 문서를 배포하여 한·중합작을 통해 일본을 타도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결실로 11월에는 민족진영만으로 중국측과 항일공동전선을 형성할 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었다. 다음해 10월에는 한국진영에서 사회주의진영까지 참가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었고, 11월에 한중민중대동맹이 결성됨으로써 사상과 민족을 초월한 반일-반제국주의 운동전선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일당 운동의 추구하던 바가 국제적으로 확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1999).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도산 안창호의 생애])


유일당운동 동지들과 함께 있는
도산 선생(오른쪽에서 두번째)
만보산 사건을 풍자한 포스터(1931):
일본이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을 폭로하는 내용

6.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 의거



▒ 상해 홍구 공원에서 일본군 사령관 폭사

1932년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해를 점령한 일본은 훙구공원에서 대대적인 전승기념 및 천장절 기념식을 가졌다. 김구(金九)의 명령을 받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단원 윤봉길은 그 해 4월 29일 폭탄장치를 한 물통과 도시락을 들고 일본인으로 가장, 식장에 들어가 오전 11시 40분경 참석자 전원이 묵도하는 시간에 폭탄을 던졌다.


  거사에 앞서 태극기 앞에 선 윤봉길 의사
(1932. 4. 26)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사령관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가 즉사하고, 해군 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는 한쪽 눈을 실명하였으며, 주중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등은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신분을 안 밝히고 자결하려 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어 피체된 후, 일본으로 이송되어 이사카와 육조 공병 작업장에서 극비리에 사형당하였다.
이 거사는 일제를 크게 자극하였고, 일본 관헌은 한국 교포들의 근거지에 난입하여 사건과 무관한 안창호 선생 등 11명을 검거하였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만보산 사건으로 한때 악화되었던 중국 거류 한국인과 중국 관민과의 감정이 호전되고, 교포에 대한 중국인의 환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임시정부는 중국정부로부터 후대를 받게 되었다. 장제스(蔣介石)는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격찬하였다.

윤봉길 의사가 홍구 공원 의거 현장에서 일본군에 연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