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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산 안창호 선생
2. 도산 안창호 선생 가출옥
3. 이 한마디: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
4.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5. 흥사단 본부 서울로 이전
6. 도산공원 개장

1. 도산 안창호 선생


▒ 서울 구치소 유치

일제에 의해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의거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구속된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32년 6월 7일 서울 종로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선생의 구속는 이번이 세 번째에 해당한다. 1909년 한국에 잠시 귀국해 있는 동안 안중근 의사의 하얼삔역 의거로 2개월간 피체된 적이 있으며, 1927년에는 중국 길림성에서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경찰에 20여일간 피체되기도 하였다.
윤봉길 의거에 의한 이번 피체에 대하여 일제가 자세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피체 당시의 상황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인품에 감동하는 사람들이 많아, 당시의 상황을 소개한다.
사실 홍구 공원에서의 의거는 백범 김구 선생의 지시에 의해 한인애국단에 소속해 있던 윤봉길 의사가 실행한 것이다.

  도산이 피체된 소식을 알리는 전보문. 위쪽의 것은 한글을 표기하지 못해 우리말 소리대로 알파벳으로 옮겨적은 것이다.

따라서 윤봉길 의거가 발생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사회 지도자들은 재발리 피산하였다.
하지만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는 이 날 한 가지 약속이 잡혀있었다. 이전에 조상섭 목사의 손자 돌잔치에 갔다가 소년동맹단에 2원을 기부하기로 당시 상해 교민단장인 이유필의 아들 이만영에게 약속을 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약속을 지키는 성품의 도산 선생은 기필코 이만영에게 2원을 주기 위해 이유필의 집을 찾으셨다.
그런데 홍구 공원의 의거로 민족지도자들을 잡기에 혈안이 되었던 일제는 윤봉길의거에 민단장이 관여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유필을 잡기 위해 그의 집에서 잠복한 상태였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유필 집에서 체포되었다.

(참고: 곽림대(1968). 『안도산』
전영택 편(1967). 『도산 안창호 선생』, 대한기독교 계명협회.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편(1999).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도산 안창호의 생애』)

도산 피체 현장에 있었던 소년동맹회 부회장 백준출이 도산 피체 당시 상황을
증언하면서 그린 그림: 도산은 조상섭 목사 집에서 나와 뒷길로 이유필 집으로
감으로써 큰 길가에서 도산에게 위험을 알리려 한 전령을 만나지 못했다.

2. 도산 안창호 선생 가출옥


▒ 일제의 감시 철저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35년 2월 10일 만2년 3개월의 옥고를 마치고 가출옥하였다. 도산 선생은 서울로 압송된 이후 재판을 거쳐 4년의 징역을 선고 받고 대전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었는데, 수형생활은 다른 재소자들까지도 감화시킬 정도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허약해진 도산 선생의 건강상태도 고려된 것으로 보이는데, 출옥 당시 도산 선생은 심한 소화불량과 함께 거동이 불편하였으며 이를 모두 뽑고 틀니를 해야 할 정도였다.
출옥 이후 도산 선생은 일제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출옥 직후 서울에 잠시 올라왔을 때, 선생은 가회동 박홍식의 집에서 김성수· 송진우·김병로 등의 인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이날부터 일제는 박홍식의 집 정원에 천막으로 임시 파출소를 설치하여 감시를 시작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수형자 기록카드.


이런 감시 속에서도 군중들의 존경은 열광적이어서 도산이 기차를 타면 정거장마다 사람들이 모여 선생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를 원하였으며, 마침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도산 선생을 보기 위해 4천여명의 군중이 몰려들기도 하였다.
일제의 감시가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자 도산 선생은 평양 근처의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짓고 은거를 시작하셨다. 애초에는 전국을 돌면서 연설을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할 생각이었지만, 일제는 도산선생의 연설회를 금지하고 도산이 20명 이상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금지시킴으로써 활동을 못하게 철저히 방해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만나기 위해 다양한 편법을 활용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편법으로 활동하는 일은 동포들에게 폐가 될 뿐이라며 은거를 시작한 것이다.

  가출옥 당시의 도산 안창호 선생


(참고: 이광수(1998). [도산 안창호] 제3판. 흥사단출판부
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안성결(1996).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동아일보, 1935. 2. 13.)


3. 이 한마디: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대전감옥에서 나오신 이후 잠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시면서 사람들을 만나 간단한 연설회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때 선생은 선천과 신의주도 방문하였는데, 선천에서의 일화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일화는 선천에서 수양동우회원이었던 백영엽 목사의 집에서 있었던 것인데, 자세한 이야기를 백영엽 목사 본인으로부터 들어보자.

백영엽: (도산 선생이 선천을 방문하실 때) 내가 환영대표로 정주까지 마중을 갔습니다. 가보니 물론 일본 형사가 따라다니지 않겠어요. 정주에서 하루 저녁 말씀하시고 이튿날 아침에 모시고 선천으로 갔습니다. 선천에서는 우리집에 유숙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번갈아 찾아왔습니다.
우리집에 묵으시도록 모시기는 하였으나 어디 쓸 만한 이부자리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김낙영 씨 집에 가서 새며느리가 해온 좋은 비단 이불을 빌려다가 깔아 드리고 좋은 병풍도 쳐드렸지요.
그랬더니 도산 선생은 '내가 와서 이런 폐를 끼쳐서 되겠나?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나? 내가 동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였다고 도포들한테서 이런 존경을 받는가?' 하면서 의복을 단정히 입으시고 꿇어 앉으셨습니다.
"백 목사. 나와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하시다가 우시면서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죄인이올시다. 이 민족이 저를 이렇게 위해 주는데 저는 민족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죄인이올시다."
그냥 우시면서 기도를 올리지 않으시겠어요. 그것을 보면서 '선생이 민족을 위하여 한 일이 없어서 죄인이라고 하시니, 우리는 도대체 뭘까?' 선생께서 자신의 부족과 결함을 이렇게 눈물로 자성하시는 것이 나에게는 평생에 가장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참고: 박현환(1954), [속편 도산 안창호]. 삼협문화사)

평북지방 순회 중 정주읍내의 가납공원에서(1935):
가납공원은 러일전쟁의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다.

4.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 네번째 피체 후 건강악화로

민족의 큰 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향년 60세를 일기로 1938년 3월 10일 오전 0시 5분에 서거하였다. 발인은 3월 12일이었으며, 친지들은 시신을 평양으로 모실 것을 희망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망우리 공동묘지로 매장되었다.
민족의 큰 별이 지자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의 온 겨레가 슬퍼하였다. 3월 13일에는 중국 한구(漢口)에서 좌파의 독립운동세력과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에서 각각 추도식을 가졌으며, 3월 22일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4월 10일에는 중경(重慶)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4월 15일에는 장사(長沙)에서 중국 정치·사회계 인사들을 초빙한 가운데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네번째 피체는 '동우회 사건'이 빌미가 되었다. 동우회는 수양동우회가 발전한 단체이다.


  동우회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김복형
(오른쪽)·이국전(왼쪽)과 함께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 이국전은 미술학도로서 도산 선생이 서거하신 이후 도산 선생의 사면(데드 마스크)를 제작하였다. 하지만 도산 선생의 사면이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데에 사용될 것을 우려한 일제는 그 마스크를 강제로 압수하여 없앴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신사참배 강요 및 언론·집회의 자유제한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호히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동우회 역시 일제의 정치적 요구들에 협력하지 않자 그동안 묵인해오던 동우회의 민족운동을 문제삼고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많은 관련자들을 체포한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37년 6월 28일에 송태산장에서 피체되어 서울의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나 12월 24일 숙환인 위장병과 폐결핵 증세로 보석출감하였으며, 재판소가 지정한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던 중 서거하신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도산 선생은 병상에서 운명하시기 직전까지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셨다고 한다. 선생은 유언을 남기시지는 않았으나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대한은 독립된다. 머지 않아 독립된다", "목인아(睦仁; 메이지유신을 시작한 일본왕, 한일병합을 성사시킴),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참고: 이광수(1998). [도산 안창호] 제3판. 흥사단출판부
안성결(1996).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편(1999).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도산 안창호의 생애』)

제1회 수양회 동우회 기념 사진(1931):
맨 앞줄 왼쪽부터 이영학, 김병연, 이인수, 김동원, 이광수, 박선제, 유기준.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배혁, 조명식, 노준탁, 김윤경, 정재호, 백영엽, 유상규, 오익은. 맨 뒷줄 왼쪽부터 주요한, 김기만, 최능진, 이종수, 박원규, 장리욱, 채우병, 전재순, 김용장

5. 흥사단 본부 서울로 이전



1948년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10주기를 맞이하여 흥사단은 본부를 미국에서 국내로 이전하였다. 1913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창립된 이후 35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창립한 단체이다. 선생의 이런 노력은 이미 신민회나 청년학우회 등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조직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도산 선생은 망명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흥사단 조직은 본래 한국에서 출발하여 외국으로 확산되는 것이 당연한 순서겠지만, 불행히도 일제 식민지 역사는 그 순서를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미주에서 크게 활성화된 흥사단은 이후 해외와 국내로 활동영역을 넓혀, 1920년에는 상해에서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그리고 국내에는 1922년의 서울에서 결성된 수양동맹회와 1923년 평양에서 결성된 동우구락부가 1925년에 수양동우회로 합쳐져 흥사단 국내지부의 역할을 하였다.


  해방 후 흥사단 본부 건물로 쓰인 대성빌딩(서울 명동). 현재의 흥사단 본부는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있다.

흥사단은 일제통치기간 중 큰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1937년의 동우회 사건은 도산 선생 서거의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동우회 회원들은 일제로부터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아 옥중 순국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집요한 전향을 강요받기도 하였다. 1940년에는 일제는 일방적으로 흥사단 원동지부 해산성명서를 발표하였으나 이미 중경으로 이동한 단원들이 해산을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흥사단원동위원부 창립대회 사진(1920년 9월 20일 상해)

6. 도산공원 개장



▒ 도산선생의 유해 이장

1973년 11월 10일 도산 안창호 선생의 탄생 95주년과 흥사단 창단 60주년을 맞아 도산공원이 개장되었다.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 선생을 존경하는 민간인들이 정부와 함께 정성을 모아 만들어졌으며, 1971년 4월 기공이후 2년 7개월여 만에 완공되었다.
개장 다음날인 11일에는 도산공원에는 조국의 광복을 끝내 보지 못하고 서거하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해를 미국의 이혜련 여사의 유해와 함께 이장하는 의식이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최초로 국무총리와 내무총판을 역임하신 분으로, 평생에 걸쳐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계몽을 위해 힘쓰셨던 분이다.


  도산 공원의 상징인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존경하여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선생의 유해는 일제가 망우리 공동묘지에 매장한 그대로 방치되어 왔다가 도산 공원을 조성하여, 선생의 유해를 공원으로 옮겨 안장한 일은 식민지 역사가 남겨놓은 또다른 상처를 정리한다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도산공원 내의 도산 내외분 묘